이사야 33장 주해 및 묵상
이사야 33장은 이사야 28–33장에 걸친 “화(禍, 경고)의 연속”을 마무리하는 절정의 본문입니다. 본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백성을 위협하는 파괴자에게 선포되는 심판의 선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온(צִיּוֹן, 치욘, tsiyyon) 가운데 임하시는 여호와(יְהוָה, YHWH)의 은혜와 통치가 어떤 안정과 영광을 이루는지 보여 주는 구원의 환상입니다. 특별히 이 장은 “사람의 계산이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인간의 외교, 동맹, 군사력은 때때로 필요해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는 순간 믿음은 꺾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와 기도는, 세상이 보기에는 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본문은 크게 세 흐름으로 움직입니다.
- 첫째, 파괴자에게 임할 “화”와 반전의 법칙(1절)입니다.
- 둘째, 시온 공동체가 드리는 간구와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응답(2–14절)입니다.
- 셋째, 의롭게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안전, 그리고 왕의 영광과 시온의 확정된 평안(15–24절)입니다.
이사야 33장은 단지 “앗수르가 망했다”는 역사적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배신과 약탈로 세운 권세는 스스로 무너지고, 은혜를 구하는 백성은 하나님 안에서 새 질서를 얻습니다.
이사야 33장 구조 분석
파괴자(약탈자)와 배신자에게 임하는 화: 심판의 반전 법칙 (1절)
시온의 기도와 은혜의 간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2–6절)
위기의 현실 묘사와 하나님의 개입 선언: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 (7–12절)
시온의 거룩 앞에서의 두려움과 의인의 조건: 불 앞에 설 자 (13–16절)
왕의 영광과 안정된 시온의 환상: 용서받은 공동체의 평안 (17–24절)
파괴자(약탈자)와 배신자에게 임하는 화: 심판의 반전 법칙 (1절)
1절은 본장의 문을 여는 단호한 경고입니다.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הוֹי(호이, hoy)로, 선지자적 애가(哀歌)와 법정적 선고가 함께 담긴 표현입니다. 이 ‘화’의 대상은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입니다. 여기서 “학대하다/파괴하다”는 어근이 שָׁדַד(샤다드, shadad)로 연결되고, “약탈자/파괴자”는 שֹׁדֵד(쇼데드, shoded)**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한 “속이다/배신하다”는 어근은 בָּגַד(바가드, bagad), “배신자”는 בֹּגֵד(보게드, boged)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본문은 단순한 폭력만이 아니라 신뢰를 깨뜨리는 배신의 구조를 함께 겨냥합니다.
중요한 것은 1절의 “반전”입니다. “네가 학대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요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들이 너를 속이리라.”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단지 외부에서 떨어지는 처벌이 아니라, 죄의 방식이 죄인에게 되돌아오는 거울입니다. 약탈로 세운 권세는 약탈로 무너지고, 배신으로 쌓은 안전은 배신으로 붕괴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공의(מִשְׁפָּט, 미쉬파트, mishpat)—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의 신앙에도 직접 적용됩니다.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혹은 성공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고 신뢰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안전’을 만들려 할 때, 그 안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만든 폭력의 고리를 끝내시며, 언약 백성을 그 고리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이사야 33장 1절은 그래서 “너희가 의지하던 방식 자체가 무너진다”는 경고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정의롭게 정리하신다”는 소망입니다.
시온의 기도와 은혜의 간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2–6절)
2절은 공동체의 기도로 전환됩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여기서 “은혜”는 히브리어 חֵן(헨, chen) 또는 “은혜를 베풀다”의 동사형으로 **חָנַן(하난, chanan)**이 떠오릅니다. 특히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חַנּוּן(하눈, hannun)(은혜로우신)과도 연결됩니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구하는 것이 “전략”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30–31장에서 유다는 애굽과 말과 병거를 찾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방향 전환입니다.
“앙망하다”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시선을 고정해 기대는 신뢰를 뜻합니다. 히브리어로 기대와 기다림의 정서는 קָוָה(카바, qavah)(기다리다/소망하다) 계열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 신뢰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관계적 결단입니다. 이어서 “우리가 아침마다 주의 팔이 되시며”라고 말할 때, ‘팔’은 히브리어 זְרוֹעַ(제로아, zeroa‘)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현입니다. 즉 공동체는 “오늘도 우리의 힘이 되어 달라”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달라”라고 고백합니다.
3절부터는 하나님의 개입이 가져오는 세계의 변화를 노래합니다. “주의 진노하시는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여기서 하나님은 단지 ‘돕는 신’이 아니라, 열방을 흔드시는 주권자입니다. 4절은 대적의 전리품이 메뚜기 떼처럼 긁어모아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탐욕으로 모은 것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장면이자, 하나님이 약탈의 열매를 허무로 바꾸신다는 선언입니다.
5절은 본장의 핵심 신학을 다시 세웁니다.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높이 계시니) 시온에 거하심이라.” ‘지존’은 히브리어 עֶלְיוֹן(엘욘, ‘elyon)(지극히 높으신)과 연결되는 표현이고,
“거하다”는 שָׁכַן(샤칸, shakan)(거주하다) 계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높이 계실 뿐 아니라 시온에 거하신다는 점입니다. 초월과 임재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손 닿지 않는 분이 아니라, 거룩하게 임재하셔서 백성의 현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6절은 이사야 33장의 보배 같은 선언입니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여기서 “평안함/안정”에 해당하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אֱמוּנַת(에무나트, ’emunat)—אֱמוּנָה(에무나, ’emunah)(신실함, 견고함, 믿음)에서 파생—와 연결되어 이해되곤 합니다. 즉 시대의 안정은 금융이나 군사력의 총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의 견고함에서 나옵니다. 또한 “구원”은 יְשׁוּעָה(예슈아, yeshu‘ah)로, 단지 위험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출의 총체를 뜻합니다.
“지혜”는 חָכְמָה(호크마, chokhmah), “지식”은 **דַּעַת(다아트, da‘at)**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묶는 결론이 “여호와를 경외함”입니다. “경외”는 יִרְאָה(이르아, yir’ah), 곧 하나님 앞에서 떨며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시대의 보배는 자원이 아니라 경외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국가와 교회에 주는 근본 처방입니다.
칼빈은 이런 구절들에서, 교회의 안전을 외적 조건의 유리함에서 찾는 습관을 강하게 경계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함(’emunah)이 무너지면, 가장 풍요로운 조건도 불안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와 경외(yir’ah)가 세워지면, 부족한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견고함을 주십니다.
위기의 현실 묘사와 하나님의 개입 선언: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 (7–12절)
7절부터는 위기의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용사들이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외교적 협상이 깨지고, 사신들이 눈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8절에서는 “큰 길이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교통의 단절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포로 얼어붙어 정상 기능을 잃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언약이 깨지고(“그가 언약을 파하였다”), 증인이 멸시되고, 사람이 존중받지 못합니다. 전쟁은 단지 국경 분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뢰 구조를 무너뜨립니다.
9절의 자연 묘사는 공동체의 황폐를 확대합니다. 레바논이 부끄러워 마르고, 샤론이 사막처럼 되고, 바산과 갈멜이 잎을 떨어뜨린다고 말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구약적 상징을 읽게 됩니다. 풍요의 상징들이 시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죄와 폭력이 땅과 삶을 함께 메마르게 한다는 성경적 통찰입니다.
10절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 여기서 “일어나다”는 히브리어로 קוּם(쿰, qum)(일어서다, 행동에 나서다) 계열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라는 말은 하나님이 늦으신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확한 때에 개입하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이어서 “이제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이제 내가 지극히 높아지리라”는 선언은, 위기의 해답이 ‘유다가 강해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높아지심에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11–12절은 대적의 허무를 불과 연기로 표현합니다. “너희는 마른 풀을 잉태하고 초개를 낳을 것이라.” 인간이 만든 계획이 생명을 낳는 듯해도 결국은 마른 풀, 즉 불에 타기 쉬운 결과를 낳습니다.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사르리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호흡’은 히브리어 **רוּחַ(루아흐, ruach)**로도 연결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뿜어낸 교만과 분노의 숨이 자기 자신을 태우는 불이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죄는 바깥의 심판만으로 무너지지 않고, 자기 안의 열기 때문에 스스로 타 들어갑니다.
시온의 거룩 앞에서의 두려움과 의인의 조건: 불 앞에 설 자 (13–16절)
13절에서 하나님은 “먼 데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 모두에게 자신의 행하심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특정 집단의 승리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열방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 떱니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여기서 “불”은 אֵשׁ(에쉬, ’esh)이고, “삼키다”는 소멸시키는 심판의 이미지를 줍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거룩(קָדוֹשׁ, 카도쉬, qadosh)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는 견딜 수 없습니다.
15절은 그 불 앞에 설 수 있는 자의 윤곽을 제시합니다. “의롭게 행하는 자”는 צֶדֶק(체데크, tsedeq)의 삶을 사는 자이고, “정직히 말하는 자”는 언어에서 진실을 지키는 자입니다. 또한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는 경제적 탐욕을 끊는 자입니다.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권력과 이익의 결탁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고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는 폭력과 음란과 불의의 향락을 끊는 자입니다.
이 목록은 “구원받는 자의 공로 목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임재 앞에서의 삶의 정렬”입니다. 이사야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예배만 화려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돈·권력·쾌락의 자리에서 정직과 절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본문을 다룰 때,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참 신앙의 열매”임을 강조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yir’ah)하는 마음이 실제 삶의 정의(mishpat)와 의(tsedeq)로 나타납니다.
16절은 그런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보장이 될 것이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보장/요새”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신다는 구약의 반복된 언어와 연결됩니다. 안전은 담장 높이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견고함에서 옵니다. 그리고 양식과 물의 공급은 하나님이 단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삶의 지속을 책임지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왕의 영광과 안정된 시온의 환상: 용서받은 공동체의 평안 (17–24절)
17절은 본장의 가장 밝은 약속 중 하나입니다.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움 가운데서 보며.” 여기서 “왕”은 מֶלֶךְ(멜레크, melekh)이고, “아름다움/영광”은 יֹפִי(요피, yofi) 또는 영광의 어휘군과 연결됩니다. 이 장면은 단지 정치 지도자를 미화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통치의 정상성, 곧 의로운 통치의 회복을 보여 줍니다. 또한 “광활한 땅을 보리라”는 표현은 공포로 좁아진 시야가 다시 열리는 회복을 뜻합니다. 죄와 두려움은 시야를 좁히고, 믿음과 구원은 시야를 넓힙니다.
18절은 위기의 기억을 회상합니다.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할 것이라.” 회복된 자는 고난이 없었던 사람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기억하되 그 기억이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19절은 “방자한 백성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이 알아듣기 어렵고, 혀가 더듬어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표현은, 폭력적 권세가 주는 낯섦과 공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공포는 지나갑니다.
20절은 시온의 환상을 직접 명령형으로 제시합니다. “너는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 성을 보라.” 시온은 단지 군사 요충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견고히 서 있는 장막”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장막은 원래 이동성과 임시성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옮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공동체가 더 이상 유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안정된 거처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21절은 시온을 “넓은 강과 하수”가 있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예루살렘의 지형적 현실을 떠올리면, 이것은 문자적 설명이라기보다 상징 언어입니다. 강과 하수는 생명과 풍요, 그리고 방어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노 젓는 배가 다니지 못하고 큰 배가 지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대적의 침입이 차단되는 안전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시온의 강이 되십니다. 인간이 만든 방어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자연 같은 보호입니다.
22절은 신학적 중심 선언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장이시요(שֹׁפֵט, 쇼페트, shofet), 여호와는 우리의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מְחֹקֵק, 메호케크, mechoqeq),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מֶלֶךְ, melekh)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재판장(정의), 입법자(질서), 왕(통치)이 모두 하나님께 귀속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핵심 구조입니다. 인간 왕권이 흔들릴 때도, 하나님이 이 세 직무를 완전하게 수행하십니다. 결국 구원은 제도의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사실에서 옵니다.
23절은 대적(또는 위기의 세력)이 “돛줄을 풀고 돛대도 세우지 못한다”는 이미지로 무력화됨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놀라운 역전이 나옵니다. “그 때에 많은 전리품을 나눌 것이라.” 이것은 공동체가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빼앗겼던 것이 회복되는 장면입니다. 특히 “저는 자도 탈취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강자만 이익을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회복이 확장되는 그림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24절은 결론처럼 모든 것을 묶습니다.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여기서 “사죄함/용서”는 히브리어 נָשָׂא עָוֹן(나사 아본, nasa ‘avon)—‘죄악(עָוֹן, 아본, ‘avon)을 들어 올려 제거하다’—의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즉 시온의 최종 회복은 군사적 승리나 경제적 풍요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핵심은 용서입니다. 죄가 제거될 때, 공동체의 병든 구조도 치유됩니다. 물론 이 구절을 단순히 “믿으면 병이 없다”로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공동체가 더 이상 죄의 저주 아래서 신음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게 된다는 ‘구속사적’ 약속입니다. 죄 사함이 회복의 뿌리입니다.
마무리
이사야 33장은 파괴자에게 선포되는 הוֹי(호이, hoy)로 시작하지만, 시온의 용서와 평안으로 마칩니다. 배신자(בֹּגֵד, boged)와 약탈자(שֹׁדֵד, shoded)는 스스로 무너집니다. 그들이 의지한 방식이 그들의 심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 백성의 길은 다릅니다. 그들은 은혜(חָנַן, chanan)를 구하고, 하나님의 팔(זְרוֹעַ, zeroa‘)을 기다리며, 시대의 안정(אֱמוּנָה, ’emunah)을 외적 장치가 아니라 여호와 경외(יִרְאָה, yir’ah)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קוּם, qum) 하실 때, 대적의 소리는 꺼지고, 시온은 흔들리지 않는 장막이 됩니다.
특히 22절의 선언은 오늘 교회와 성도에게 결정적인 고백이 됩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재판장이시고(shofet), 율법을 세우신 이시고(mechoqeq), 우리의 왕이시며(melekh), 그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יְשׁוּעָה, yeshu‘ah). 그러므로 신앙은 결국 “무엇으로 시대를 견디는가”의 문제입니다. 이사야 33장은 말합니다. 시대의 보배는 여호와 경외이며, 회복의 중심은 죄 사함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 세상의 장치를 붙들 때, 하나님은 그 장치를 흔드셔서 우리를 다시 기도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시온을 새롭게 하시고, 왕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며, 용서받은 백성의 평안을 주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