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도우시는하나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도우시는하나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이사야 31장 주해 및 묵상

 

이사야 31장 주해 및 묵상

이사야 31장은 이사야 30장과 한 덩어리처럼 맞물려 움직이는 본문입니다. 앞 장에서 이미 “애굽을 의지하는 반역”을 고발하셨다면, 31장에서는 그 의존의 뿌리를 더 깊이 파헤치고, 하나님께로의 전환을 더 날카롭게 촉구하십니다. 유다는 눈에 보이는 군사력—말과 병거—에 마음을 빼앗겼고, 하나님은 그 마음의 방향 자체를 “화”(경고)로 다루십니다. 중요한 점은, 본장이 단지 외교 실패를 비판하는 정치 평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국가 전략의 차원을 넘어, 언약 백성의 신앙 구조를 드러냅니다. 도움을 구하는 방식이 곧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장은 “하나님의 두 가지 방식”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거짓 의지처를 꺾으시는 공의이고, 다른 하나는 시온을 지키시는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는 자의 기대를 무너뜨리시지만, 동시에 시온을 향해 “사자”와 “새”라는 비유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강력한 보호를 선포하십니다. 따라서 이사야 31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진짜 믿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리고 곧바로 길을 제시합니다. “돌아오라.” 히브리어로 ‘돌이키다’는 שׁוּב(슈브, shuv)인데,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 곧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뜻합니다.


이사야 31장 구조 분석

  •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화와 신뢰의 전도(顚倒) 고발 (1–3절)

  • 시온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보호 비유: 사자와 새의 이미지 (4–5절)

  • 회개 촉구와 우상 폐기: ‘돌아오라’는 언약적 초청 (6–7절)

  • 앗수르의 붕괴와 하나님 주권의 승리: 사람의 칼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 (8–9절)


애굽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화와 신뢰의 전도 고발 (1–3절)

1절은 매우 강한 경고로 시작합니다.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הוֹי(호이, hoy)**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포하는 재앙 예고이자 영적 진단입니다. 마치 판결문이 낭독되는 듯한 어조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 유다의 선택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드러냅니다.

이 ‘화’의 대상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도움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도움’은 히브리어 **עֵזֶר(에제르, ezer)**로,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구원적 도움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하나님이 ‘도움’이 되신다). 그런데 유다는 그 ‘에제르’를 애굽에서 구하려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 쓰시던 ‘도움’의 자리를 제국이 대신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전도(顚倒)입니다.

이들이 의지하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말”과 “병거”입니다. 말은 סוּס(수스, sus), 병거는 **רֶכֶב(레케브, rekhev)**로 표현됩니다. 본문은 “병거가 많음”과 “마병이 심히 강함”을 반복하며, 숫자와 규모가 주는 안정감이 얼마나 큰 유혹인지 정면으로 다룹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사람은 “크기”를 붙잡습니다. 더 많은 자원, 더 강한 연합, 더 확실한 장치.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확실함’이 사실은 신앙의 불확실함을 숨기는 가면임을 폭로하십니다.

1절 후반부의 핵심은 이 문장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신 이”는 유명한 칭호 קְדוֹשׁ יִשְׂרָאֵל(끄도쉬 이스라엘, qadosh yisra’el)입니다. ‘거룩하다’(קָדוֹשׁ, qadosh)는 단지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이 피조물과 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며 동시에 언약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임을 내포합니다. 유다가 문제인 것은 외교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배제한 채 안전을 구성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앙망하다’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눈을 들어 방향을 맞추는 신뢰의 행위입니다. 신뢰의 시선이 애굽으로 내려가 있습니다.

2절은 반전처럼 보입니다. “여호와도 지혜로우사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유다는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참 지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람의 지혜는 계산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악을 행하는 집과 행악자를 돕는 자를 함께 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악의 연합’을 분리해서 보지 않으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와 악을 돕는 자는 같은 흐름 안에 있으며, 같은 심판 아래 놓입니다. 불의한 권세와 타협하면서 “나는 직접 악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방식은 성경의 공의 앞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3절은 결정적 진단입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기서 ‘사람’은 אָדָם(아담, ’adam)의 범주이고, ‘육체’는 בָּשָׂר(바사르, basar)의 범주입니다. 이 말은 애굽을 모욕하기 위한 조롱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를 지적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처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영”은 רוּחַ(루아흐, ruach)로,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능력과도 연결됩니다. 말과 병거의 힘은 결국 ‘바사르’, 즉 한계 있는 재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을 펴시면(심판의 개입), 돕는 자도 넘어지고 도움 받는 자도 엎드러져 함께 멸망합니다.
이 장면은 신앙의 현실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연합은 함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무너집니다.


시온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보호 비유: 사자와 새의 이미지 (4–5절)

4절부터 분위기가 바뀝니다. 하나님이 “치신다”에서 끝나지 않고, 시온을 지키신다로 나아갑니다. 이 전환은 이사야 예언의 독특한 결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거짓 신뢰를 꺾으시지만, 동시에 자기 백성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보호를 두 개의 이미지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는 사자, 다른 하나는 새입니다.

먼저 4절의 사자 비유입니다. “사자와 젊은 사자가 먹이를 움킨 것 같이.” 사자는 힘의 상징입니다. 히브리어로 사자는 אַרְיֵה(아르예, ’aryeh)이고, “으르렁거리다”에 가까운 표현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시온 산을 위하여 “내려오사 싸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려오시는’ 임재의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자 비유의 핵심은, 목자들이 크게 소리쳐도 사자가 겁먹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즉, 세상의 위협과 소란은 하나님의 뜻을 흔들지 못합니다. 인간의 군대가 아무리 소리쳐도, 하나님이 붙드신 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나운 분노로만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흔들리지 않는 보호로 묘사됩니다. 유다가 애굽을 찾는 이유는 “우리가 지킬 수 없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내가 지킨다”를 사자의 이미지를 통해 선포하십니다. 즉, 신앙은 결국 “내가 지키는 삶”에서 “하나님이 지키시는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5절은 또 다른 이미지로 확장됩니다. “새들이 날아다님 같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리니.” 여기서 “새들”은 צִפֳּרִים(찌포림, tsipporim)—작은 새들을 포함한 조류를 가리키는 복수형—로 이해할 수 있고, “날아다니다”는 움직임이 강조됩니다. 사자가 ‘힘으로 붙드는 보호’라면, 새 비유는 ‘둘러싸고 덮는 보호’에 가깝습니다. 새가 새끼를 보호할 때 날개 아래 감싸듯,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감싸십니다.

그리고 5절에 중요한 동사들이 연속됩니다. “보호하며, 건지며, 뛰어넘어(지나가) 구원하리라.”
이 반복은 하나님의 구원이 단일 행동이 아니라, 여러 국면을 가진 전인적 보호임을 보여 줍니다. 특히 “건지다”는 구원 어휘와 연결되며, 하나님이 단지 위협을 막아주시는 수준을 넘어 ‘구출’하신다는 뜻을 담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받습니다. 왜 유다는 이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을 찾았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애굽의 말과 병거는 눈에 보입니다. 신앙은 결국 “보이지 않는 확실성”을 붙드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시각적 상징(말·병거)과 시각적 비유(사자·새)를 통해, 백성의 상상력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놓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약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보이는 힘의 근원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회개 촉구와 우상 폐기: ‘돌아오라’는 언약적 초청 (6–7절)

6절은 본장의 핵심 초청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여기서 ‘거역하다’는 단순 실수나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깊이’ 비틀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은 유다의 죄를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돌아오다’는 앞서 언급한 שׁוּב(슈브, shuv)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회개를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합니다. 슈브는 단지 “죄를 후회한다”가 아니라, 관계의 주인을 바꾸는 행위, 곧 하나님께로 방향을 되돌리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 31장의 회개는 감정의 정돈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께로, 말과 병거에서 여호와께로.

7절은 회개의 매우 구체적인 열매를 제시합니다. “너희가 각기 자기가 손으로 만든 은 우상과 금 우상을 던져 버리리니.”
우상은 히브리어로 흔히 פֶּסֶל(페셀, pesel)—‘새긴 형상’, 깎아 만든 우상—로 표현되거나, אֱלִילִים(엘릴림, ’elilim)—‘헛것들’, ‘무가치한 신들’—로 조롱되듯 불립니다. 중요한 것은 “손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든 신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사람의 욕망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붙드는 것은 곧 “내가 통제 가능한 신”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회개를 “우상을 던져 버리는 행위”로 묘사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회개는 ‘추가’가 아니라 ‘폐기’입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 신앙에 무엇을 더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더하고, 헌신을 더하고, 예배를 더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말하는 회개의 본질은, 하나님을 대체하던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던 의지처를 끊지 않으면, 아무리 종교 활동을 더해도 마음의 중심은 바뀌지 않습니다.

둘째, 우상 폐기는 공동체의 미래를 바꿉니다.
이사야 30–31장의 맥락에서 우상은 단지 종교 조각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안정”을 상징하는 모든 장치를 포함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은과 금’은 형태만 바꾸어 존재합니다. 돈, 평판, 인맥, 기술, 제도, 건강, 정보, 심지어 종교적 성취감까지도 하나님을 대체하면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무엇보다 “나의 신뢰가 어디에 묶여 있는가”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칼빈은 회개를 “하나님께로 돌이켜 전 존재가 새 질서로 들어가는 것”으로 강조했습니다. 이사야 31장은 바로 그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적하실 뿐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는 구체적 길—돌아오라, 버리라—를 주십니다.


앗수르의 붕괴와 하나님 주권의 승리: 사람의 칼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 (8–9절)

8절은 본장의 결론이자, 유다의 공포를 정면으로 다루는 선언입니다. “앗수르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여기서 핵심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그 칼은 사람의 것이 아니요, 인생의 칼도 아니라.”
즉, 앗수르의 몰락은 인간 군사력의 승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애굽을 찾는 습관을 끊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의 방식 자체를 바꾸십니다. “사람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으로 앗수르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유다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첫째, 너희가 약해도 하나님은 이기신다.
유다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스스로 강해지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는 방식”으로 구원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의 안정은 내 힘의 증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서 옵니다.

둘째, 그러므로 애굽은 불필요하다.
만약 앗수르를 이길 힘이 인간에게서 나와야 한다면, 유다는 애굽을 찾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의 칼이 아니다”라고 못 박으시는 순간, 애굽 의존은 신학적으로 무의미해집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8절 후반부는 앗수르 군대의 공포를 말합니다. “그의 젊은이들은 노역하는 자가 될 것이며.” 이것은 강대국의 자부심이 굴욕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젊은이’는 힘의 상징인데, 그 힘이 종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결국 종살이의 형태로 무너집니다.

9절은 더 강렬합니다. “그의 반석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옮겨가겠고.”
여기서 ‘반석’은 צוּר(추르, tsur)로, 견고함과 안전의 상징입니다. 앗수르가 믿던 ‘반석’—군사력, 왕권, 제도, 신들—이 공포 때문에 흔들려 옮겨간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이 의지하던 견고함이 사실은 견고하지 않았다는 폭로입니다. 또한 “그의 방백들이 기를 보고 놀라리라”에서 ‘기’는 נֵס(네스, nes)—깃발, 표징—로, 전쟁의 신호이자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깃발이 그들에게는 승리의 표가 아니라 공포의 신호가 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표징은 구원하는 자에게는 소망이지만, 대적에게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9절 마지막은 시온의 독특한 신학을 담습니다.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그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불’은 אֵשׁ(에쉬, ’esh), ‘풀무/화덕’은 תַּנּוּר(탄누르, tannur)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안에 심판의 불로도, 정결케 하는 불로도 임재하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멀리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시온 가운데 “불”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은 위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축복의 자리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 불이 심판이 됩니다.
이사야 31장의 흐름에서 볼 때, 이 불은 특히 앗수르를 태우는 하나님의 임재로 읽힙니다. 시온을 향해 오는 대적은, 시온 안에 계신 하나님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패배입니다.


마무리

이사야 31장은 “의지의 신학”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장입니다. 사람은 위기에서 본능적으로 강한 것을 찾습니다. 숫자, 규모, 속도, 연합, 말과 병거.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본능을 꺾으시고, 더 깊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앙망하느냐?”
이 질문 앞에서 유다는 애굽으로 내려갔고, 하나님은 הוֹי(호이, hoy)—영적 경고—로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애굽은 אָדָם(아담, ’adam)이며 그 말은 בָּשָׂר(바사르, basar)일 뿐, 하나님처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참 도움 עֵזֶר(에제르, ezer)는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책망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시온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사자처럼 흔들림 없이 붙드시고, 새처럼 날개 아래 감싸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שׁוּב(슈브, shuv)—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회개는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פֶּסֶל(페셀, pesel)—우상—을 던져 버리는 구체적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앗수르가 “사람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무너질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의 원리가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강해지는 데서 오지 않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는 데서 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적용은 분명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내려가는 ‘애굽’은 무엇인지, 우리가 붙드는 ‘말과 병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대체한 ‘은과 금’은 무엇인지 정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하나님은 공의로 책망하시되, 은혜를 베푸시려고 우리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시온에 불 אֵשׁ(에쉬, ’esh) 이 있고 예루살렘에 풀무 תַּנּוּר(탄누르, tannur) 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금도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며, 대적을 심판하시고 백성을 정결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31장은 결국 한 문장으로 우리를 세웁니다. 보이는 힘에서, 보이지 않으나 참되신 하나님께로.

내 블로그 목록

추천 게시물

이사야 33장 주해 및 묵상

  이사야 33장 주해 및 묵상 이사야 33장은 이사야 28–33장에 걸친 “화(禍, 경고)의 연속”을 마무리하는 절정의 본문입니다. 본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백성을 위협하는 파괴자에게 선포되는 심판의 선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온(צִיּוֹ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