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그루터기, 거룩한 씨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선 이사야는 심판과 회복 사이의 긴장 속에서 민족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이사야 6장 13절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심판 가운데서도 남겨두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남은 자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거룩한 씨로서의 그루터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심판을 끝으로 마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을 남겨두신다는 소망을 다시 붙들게 됩니다.
거룩한 씨, 그루터기의 의미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켜질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배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이 말씀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직후,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주시는 심판의 메시지를 마무리하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은 선지자의 환상, 사명을 받은 장면으로 유명하지만, 그 마지막 절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알리는 신학적으로 깊은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를 보면, 먼저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라는 표현으로 소수의 남은 자를 언급하며, "이것도 삼켜질 것"이라는 말로 남은 자마저도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에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배임을 당하여도"라는 자연적 비유와 함께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라는 말로 전환됩니다. 결국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는 선언으로 결론을 맺음으로써,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아 보이는 그 자리에도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이 남아 있다는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루터기(בַּמַּצֶּ֑בֶת)'는 잘려 나간 나무의 밑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완전히 파괴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 여전히 생명의 뿌리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씨(זֶרַע קֹ֖דֶשׁ)'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남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차별적인 파괴가 아니라, 불순물을 제거하여 정결한 씨를 남기기 위한 과정임을 이 구절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심판과 남은 자의 신학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그 심판 속에서도 항상 남은 자를 보존하십니다. 이 '남은 자의 신학'은 단순히 소수의 생존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긍휼 안에서 남겨진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남겨졌으며,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어갈 거룩한 도구들입니다.
사 6:13에서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켜질 것”이라는 말씀은 남은 자조차도 완전한 정화를 경험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는 불의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는 포로로 잡혀가며, 이스라엘 민족은 뿌리째 흔들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철저한 붕괴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기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긍휼의 흔적이 아니라, 구속 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한 파괴가 아닌 ‘정화’의 뜻임을 발견합니다. 마치 은을 불로 정제하듯,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심판을 통해 정결케 하십니다. 남겨진 그루터기는 이전의 죄악에서 벗어난 새 언약의 백성으로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그들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을 ‘거룩한 씨’입니다.
은혜의 회복은 그루터기에서 시작된다
거룩한 씨는 그루터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은 생명의 시작점을 남겨두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철저하고도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자리에조차 하나님은 새로운 생명을 숨겨두십니다.
그루터기는 보잘것없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원리는 계속 반복됩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하나님은 다윗의 뿌리에서 새로운 왕, 곧 메시아를 일으키십니다(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하나님의 생명은 항상 가장 낮고, 가장 보잘것없는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것 같을 때, 관계가 끊어지고, 사역이 중단되고, 모든 것이 쓸모없어 보일 때, 하나님은 그 땅에 거룩한 씨를 심고 계십니다. 그루터기 같은 내 인생, 더 이상 열매도 기대할 수 없는 땅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그 자리를 회복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끝내지 않으시고, 언제나 구속을 계획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폐허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폐허 속에서 더욱 빛나며, 그루터기에서 시작된 새싹은 언젠가 다시 숲을 이루게 됩니다.
결론
이사야 6장 13절은 심판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한 심판과 동시에 신실한 구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잘려나가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입니다. 이 씨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남겨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심겨지고, 다시 자라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황폐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 땅에 그루터기를 남기십니다. 그루터기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증거이며 시작점입니다. 우리는 그 씨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씨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