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태복음 3:3-9, 18-23

씨뿌리는 비유 또는 네 밭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 소개되는 7가지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이며, 가장 유명한 비유이다. 비슷한 비유가 마가복음 4:1-9,누가복음 8:4-8에 기록되어 있다. 복음서마다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필자는 마태복음을 중심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 비유를 풀이하고자 한다.


1. 비유의 개요


비유는 비유론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다룬다. 먼저 비유의 목적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을 계시하는 측면이다. 감추려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감추려면 말하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것은 알리려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본 비유는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이 우선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16절과 23절은 비유의 목적이 ‘듣고 깨닫는 것’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는 감추기 위함이다. 너무나 상반된 이야기지만 이것 역시 분명하다. 14-15절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하여 계시의 말씀이 감추어졌음을 말한다. 누구에게 말씀을 감출까? 당연히 완악하고 교만한 자들이다. 의도적 감춤이 아니다. 그들의 교만과 완악함이 명백히 드러나 진리에 눈감는 것이 더 옳다. 이 부분은 좀더 논의가 필요하다 후에 다시 다룰 것이다.


이제는 다른 측면에서 비유의 목적을 알아보자. 35절에서는 시편 78:2을 인용하여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려는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지금 예수가 의도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즉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다. 너무 멀리간 것이 아니랴는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나 비유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나리의 비밀을 깨닫고 그나라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임을 안다면 극단적 해석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즉 복음에 동참하라는 해석은 적절하다. 깨달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라고 열매 맺음으로 비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동참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씨앗은 말씀이며, 열매 맺음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삶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비유 안으로 들어가 보자.


2. 비유 해석


예수는 집에서 나가 바닷가에 앉으신다. 큰 무리가 모여들자 예수는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무리는 해변에 앉아 듣는다. 그 첫 번째 비유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이다.


비유의 전제


농부는 씨를 뿌린다. 네 가지 형태의 땅이 소개 된다. 씨가 떨어진 곳은 길 갈, 흙이 얕을 돌밭, 가시떨기, 좋은 밭이다. 농부의 의도를 생각해 보자. 네 가지 형태의 땅은 네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현대의 주석가나 목사들이 착각하는데, 농부는 길 가에 씨를 뿌리지 않는다. 돌 위에도 뿌리지 않는다. 그런 바보 같은 농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러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농부가 원하지 않지만 씨를 뿌리다보면 길 가에도 떨어지고, 돌 위에도 떨어지고, 밭의 구석인 풀이 많은 곳에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 않음에 주의해야 한다. 바로 이 부분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무리들이다. 


농부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이 좋은 땅이 아닌 다른 땅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세 땅은 오직 마지막 ‘좋은 땅’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좋은 땅은 세 가지 나쁜 땅의 요소를 제거한 상태 또는 가지고 있지 않는 상태라고 해야 옳다. 이렇게 생각하면 비유의 목적은 대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이들을 위한 것임을 직감한다. 비유는 대단히 종말론적 계시다. 비유는 종말론적으로 읽어야 한다. 씨 뿌리는 비유 외에 나머지 6개의 비유는 실제적으로 종말에 대해 말한다. 유일하게 본 비유만 결과론적이다. 그렇기에 종말론적이다. 첫 번째 비유는 나머지 6개의 비유를 이끌며, 포괄한다.


길 가에 떨어진 씨앗


씨는 말씀이다.(19절) 씨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계시, 즉 복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일 것이고, 이후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나 사도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림으로 시작한다. 말씀을 전함으로 시작한다.


처음 씨앗은 길 가에 떨어진다. ‘더러는’은 ‘의도치 않음’을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씨앗이 길 가에 떨어진다. 그런데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을 새가 와서 먹어 버린다. 19절에서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을 설명한다.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한 구절을 공식화할 필요는 없지만 이 비유 안에서 의미있게 해석할 부분이 있다. 먼저는 길 가는 의도치 않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때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이 깨닫지 못하도록 곧바로 악한 자가 와서 말씀을 가져가 버린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망각이다. 말씀을 보존하지 않음으로 결국 깨닫는 기회까지 박탈당한다. 이 비유의 전체 결론이기도 하지만, 이곳에 드러난 것은 말씀이 자라는 첫 번째 적합성인 감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은 감추어져야 한다. 오직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은밀하게 간직한다. 감추어짐은 보호 또는 보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첫 번째 길 가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간직하지 않고 방치한다.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


씨앗이 두 번째 떨어진 곳은 돌밭으로 알려진 곳이다. 마태는 ‘흙이 얕은’을 추가하며 돌밭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한다. 그러니까 이곳은 씨앗이 발화해도 잘 자랄 수 없는 땅이란 뜻이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많은 밭은 돌밭이다. 흙이 많지 않아 종종 씨앗이 빨화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새싹이 말라 죽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른 비가 적절한 시기에 내리지 않으면 그 해 농사는 거의 망쳤다고 과언이 아니다.


이 씨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다.(20-21절) 흔하게 냄비 신앙이라고 부른다. 이 해석의 중심은 ‘뿌리’다. 농부의 관점에서 보면 뿌리가 내리는 흙의 부재다. 흑은 씨앗이 발화하도록 온도와 습도를 제공하며, 자라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게 한다. 결국 돌밭은 계속하여 신앙을 지속할 수 없는 외부적 환경을 말한다. 정리되지 않는 외부적 환경으로 인해 신앙이 무너진다.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


가시 떨기는 명확하게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이다.(22절) 개간되지 않은 밭이나 잡초가 제대로 제거되지 않을 경우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 처음 씨앗이 뿌려지고 발화될 때는 무리가 없다. 오히려 다른 곳보다 빠르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라지 못한다. 돌밭이 외부적 요인에 대한 것이라면 가시 떨기는 내부적 요인을 말한다. 발화는 했으나 더 이상 자리지 못한다. 이 씨앗은 발화되고 자라는 것은 그리 문제가 없으나 ‘결실’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발화이고, 자람이다.


이들은 삶의 우선순위가 절대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다. 좋은 땅 이외의 모든 땅이 그렇지만 특히 이 땅은 더욱 그렇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성공과 재물이다. 걱정하고 근심하고, 초초해 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신앙이 좋은 것 같고 겸손해 보이지만 열매 맺지 못한다. 수많은 핑계와 이유가 있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하고 넉더운 시킨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


좋은 땅은 농부가 의도한 땅이다. 적당한 습기가 있고, 흙이 있고, 영양분이 있는 땅이다. 돌이나 잡초가 없는 순수한 땅이다. 이 땅은 오직 씨앗을 위해 존재하고, 씨앗이 발화하고 자라는 데 최적화된 땅이다. 이런 땅에 떨어진 씨앗은 최적의 상태에서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이 비유의 목적은 바로 열매다. 열매는 백 배, 육십 배, 삼식 배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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