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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성경신학적 정리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오늘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성경신학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아 봅시다. 성경 공부한다 생각하시고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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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명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과거 사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고, 목적을 향해 이끌어 가십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지 않으며, 스스로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 왕과 백성, 주인과 청지기, 아버지와 자녀,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 백성, 구속주와 구속받은 자, 심판주와 책임 있는 존재의 관계로 다층적으로 설명합니다.

1. 하나님은 자존자이시고 피조물은 의존적 존재입니다

성경적 창조론의 출발점은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동사는 바라(בָּרָא)입니다. 구약에서 이 동사는 특별히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의 제작 행위라기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 행위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던 물질을 단순히 재배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세계를 존재하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십니다.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자존성(aseity)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원인 없는 원인이시며, 존재의 근원이시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반대로 피조물은 모두 의존적 존재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존재를 받고,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목적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사도행전 17장 28절

여기서 인간은 단순히 하나님이 “처음에 만들어 놓고 떠난 세계” 안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힘입어 존재합니다. 호흡, 시간, 생명, 자연 질서, 양심, 지성, 관계,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보존적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수적 성경신학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첫 번째 관계는 자존자와 의존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계셔야 하는 분이고, 피조물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필연적 존재이고, 피조물은 우연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우연성은 무가치함이 아니라, 은혜로 부여된 존재성을 뜻합니다.

2. 하나님은 초월하시면서도 내재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구별된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초월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자연, 역사, 인간 정신, 우주 법칙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 창조론과 범신론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이사야 40장 22절은 하나님을 땅 위 궁창에 앉으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보다 무한히 크시고, 거룩하시며, 자유로우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무관하게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며, 낮고 천한 자를 돌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내재성입니다.

시편 139편은 이 긴장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과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적 내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세계 밖에 계시며 동시에 세계 안에서 일하십니다. 피조물과 혼합되지 않으시면서 피조물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합니다.

하나는 범신론입니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합니다. 산도 하나님, 바다도 하나님, 인간도 하나님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엄격히 구별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개입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오늘도 세상을 붙드시고, 심판하시며, 구원하시고, 섭리하신다고 말합니다.

보수적 성경신학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되시지만, 피조물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하시지만, 세계를 보존하고 통치하십니다.

3.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르시되”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의 근원은 우연도, 혼돈도, 폭력도, 신들의 투쟁도 아닙니다. 세계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의 뜻, 권위, 능력, 계시가 결합된 창조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존재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질서가 세워집니다.

시편 33편 6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여기서 “입 기운”은 히브리어로 루아흐(רוּחַ)와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루아흐는 바람, 숨, 영을 뜻합니다. 창조는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영의 생명 부여가 함께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신약은 이 말씀 창조를 그리스도론적으로 더 깊게 해석합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입니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창조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곧 성자는 창조의 중보자이십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도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단순히 “하나님이 만들고 인간이 존재한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말씀 안에서 의미를 가지며, 성육신하신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 목적을 발견합니다.

4. 피조물은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십니다.

히브리어로 “좋다”는 말은 토브(טוֹב)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미적으로 보기 좋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고 질서 있게 창조되었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 자연, 음식, 노동, 결혼, 문화, 시간, 역사 자체가 본래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선합니다.

그러므로 보수적 성경신학은 헬라적 이원론이나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합니다. 영지주의적 사고는 물질을 낮게 보고 영혼만 고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 빛과 물, 식물과 동물, 인간의 몸까지 선하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지금의 세계에는 고통, 죽음, 부패, 질병,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타락으로 인해 창조 질서가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선하고, 타락은 왜곡이며, 구속은 회복이고, 종말은 완성입니다.

이 구조가 중요합니다.

창조 — 타락 — 구속 — 완성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이 네 단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게 창조하셨고, 인간은 죄로 그 질서를 깨뜨렸으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이루시고,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를 완성하십니다.

5.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속하지만, 인간은 그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가집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צֶלֶם), “모양”은 **데무트(דְּמוּת)**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작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고, 하나님을 대표하며,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차원을 가집니다.

첫째, 관계적 차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존재입니다.

둘째, 도덕적 차원입니다. 인간은 의와 거룩과 진리를 따라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은 새 사람을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셋째, 대표적 차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청지기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다스리라”는 명령은 폭군적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반영하는 관리와 돌봄입니다.

넷째, 소명적 차원입니다. 인간은 노동, 문화, 언어, 예술, 학문, 공동체 형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개발하고 보존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피조물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제사장적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인간은 땅에 속했지만 하늘을 향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존재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인간은 두 방향성을 가집니다. 하나는 입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연약합니다. 다른 하나는 생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단순한 동물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피조물입니다.

6.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보수적 성경신학의 핵심 명제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피조물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에게서 — 창조의 근원
주로 말미암고 — 섭리와 보존의 과정
주에게로 — 목적과 완성
그에게 영광 — 피조물의 최종 이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부족해서 피조물에게 찬양을 요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없어도 완전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사랑과 영광 가운데 충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핍 때문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하심과 영광을 자유롭게 나타내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보드(כָּבוֹד)는 무게, 중량감, 존귀함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존재의 무게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태양이 빛을 내고 달이 그 빛을 반사하듯, 피조물은 스스로 영광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시편 19편 1절은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자연은 말 없는 설교자입니다. 하늘, 별, 바다, 산, 계절, 생명의 질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영광을 의식적으로 찬양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는 단순히 도덕법 위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은 인간의 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앉으려는 것이 죄입니다.

7. 인간은 피조세계의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종종 인간 중심적 지배로 오해되지만,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인간은 피조세계의 절대 소유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청지기입니다.

시편 24편 1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관리권입니다. 관리권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훼손할 권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를 우상화해서도 안 되지만, 함부로 파괴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보수적 성경신학은 두 가지 균형을 가집니다.

첫째, 자연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신격화하거나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을 위해 무책임하게 파괴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다스리시듯 인간도 선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돌보시듯 인간도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인간의 노동과 문화 활동도 신학적 의미를 가집니다. 농사, 건축, 음악, 문학, 학문, 정치, 경제, 기술은 모두 창조 명령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문화는 우상화될 수 있고, 기술은 교만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경제는 탐욕의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화 사명은 반드시 하나님 경외 안에서 수행되어야 합니다.

8. 타락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왜곡했습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만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기 자신, 인간과 이웃, 인간과 자연의 관계 전체를 왜곡했습니다.

뱀의 유혹은 본질적으로 피조물이 창조주처럼 되려는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말이 타락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하나님 자체가 되도록 지음받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해야 했지만, 하나님을 대체하려 했습니다.

죄는 피조물이 자기 한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존해야 할 존재가 자율적 주권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아래 살아야 할 존재가 선악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인간 내면에는 수치가 생겼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책임 전가와 지배 욕망이 생겼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노동은 고통스러운 수고가 되었습니다.
생명은 죽음 아래 놓였습니다.

로마서 8장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피조세계는 인간의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피조세계의 대표적 관리자로 세워졌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창조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동시에 소망을 말합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단지 영혼이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과 관련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9. 하나님은 타락한 피조물을 버리지 않고 언약으로 붙드셨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서 중요한 단어가 언약입니다. 히브리어로 언약은 베리트(בְּרִית)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주권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지만, 특별히 언약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속의 관계 안으로 부르십니다.

타락 이후 하나님은 즉시 심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흔히 원복음이라고 부릅니다. 타락한 피조물에게 주어진 첫 구속 약속입니다.

이후 성경의 역사는 언약의 흐름으로 전개됩니다.

노아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홍수 이후 창조 질서를 보존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한 사람과 한 가문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습니다.
다윗 언약에서는 왕권과 메시아 약속이 주어집니다.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성령의 내적 갱신이 주어집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기계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며,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특히 보수적 성경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언약의 중심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언약을 깨뜨리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십니다. 구속사는 인간의 충성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역사입니다.

10.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의 중심이십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중에 오신 분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보자이시며, 구속의 중보자이시고, 새 창조의 머리이십니다.

골로새서 1장 15-17절은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여기서 세 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에게서 창조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주권적 중보자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계는 그리스도 없이 해석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해 피조세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하시매”는 헬라어 스케노오(σκηνόω)로,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구약의 성막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성막 가운데 자기 백성과 함께 계셨듯,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서 놀라운 신비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피조물로 변질된 것이 아닙니다. 성자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론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을 멀리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피조물의 조건 안으로 들어오셨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물질세계의 폐기가 아니라, 피조세계의 회복을 향합니다.

11. 십자가는 피조물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응답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주를 거역했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가 뒤집힌 상태입니다.

로마서 1장 25절은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죄의 본질은 피조물 숭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 돈, 권력, 성, 국가, 자아, 자연, 이념, 종교 체계, 성공, 인간 관계를 절대화합니다. 피조물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면 우상이 됩니다.

십자가는 이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새로운 피조물”은 카이네 크티시스(καινὴ κτίσις)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리적 변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개인의 죄 사함이면서 동시에 창조 회복의 시작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새 창조의 중심 사건입니다. 첫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면, 새 창조는 성육신하신 말씀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됩니다.

12. 성령은 피조물 안에서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성령은 창조 때부터 활동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라하프(רָחַף)로, 새가 날개 치듯 움직이는 이미지를 가집니다. 성령은 혼돈 위에 생명과 질서를 준비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 성령은 새 창조의 영으로 역사하십니다. 죄로 죽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성령은 단순한 감정적 능력이 아니라,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이 신자의 몸의 부활과 피조세계의 회복까지 연결됩니다. 성령은 개인의 내면만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종말론적 새 창조의 첫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성령 안에서 현재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13. 피조물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방치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로 다스리십니다. 섭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큰 사건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피조물에게도 미친다는 뜻입니다.

섭리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보존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계속 존재하도록 붙드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합니다.

둘째, 협력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행위와 자연 법칙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내지만,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셋째,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목적을 향해 모든 것을 이끄십니다. 인간의 악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고백이 대표적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창세기 50장 20절

이 말은 악이 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보다 크시며, 악을 사용해서도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십니다.

보수적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붙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 둘은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풀기 어려운 신비이지만, 성경은 둘 다 분명히 가르칩니다.

14. 피조물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책임 있는 존재입니다

현대인은 자유를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율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피조물의 자유는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 이해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결국 죄의 종노릇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을 때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자유롭지 않고, 나무가 뿌리 없이 자유롭지 않듯,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창세기 2장의 선악과 명령은 인간의 피조물성을 확인하는 표지였습니다.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하나의 금지 명령을 통해 자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선악과는 단순한 과일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권의 문제입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기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은 사건입니다.

오늘날에도 죄의 구조는 동일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감정, 시대정신, 욕망, 여론, 이념, 경제적 이익을 더 높은 기준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창조주의 말씀 아래 있을 때 가장 인간답습니다.

15. 피조물은 예배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서 예배는 중심입니다. 예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하는 존재의 질서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은 천상의 예배를 이렇게 보여 줍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예배의 근거는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배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인간은 예배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피조물을 예배합니다. 돈, 사랑, 성공, 자아, 국가, 지식, 미모, 건강, 권력, 종교적 업적이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인간이 종교적이어서 생기는 부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왜곡입니다. 올바른 예배는 인간을 회복시키고, 잘못된 예배는 인간을 파괴합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바른 관계는 예배에서 회복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는 행위가 아니라, 피조물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행위입니다.

16.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언약적 사랑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단지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지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고, 언약적 사랑이며, 자기희생적 사랑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단어가 헤세드(חֶסֶד)입니다. 헤세드는 인자, 자비, 신실한 사랑, 언약적 충성을 포함하는 매우 풍부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헤세드로 자기 백성을 붙드십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장 16절

여기서 “세상”은 헬라어 코스모스(κόσμος)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코스모스는 종종 하나님을 거역하는 타락한 세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만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반역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께 반역했지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피조물을 구속하셨습니다. 구속은 창조보다 작은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구속은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더 깊은 계시입니다.

17. 종말에는 피조세계가 폐기되지 않고 새롭게 됩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단순히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천상으로 올라가는 사상이 아닙니다. 성경의 최종 소망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은 말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여기서 “새”는 헬라어 카이노스(καινός)입니다. 이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새로움이라기보다, 질적으로 새롭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쓰레기처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과 저주를 제거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영혼만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몸은 이전 몸과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입니다. 이것이 피조세계의 미래를 보여 줍니다.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의 탄식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응답됩니다. 더 이상 저주가 없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십니다.

성경의 결말은 인간이 피조세계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피조세계 가운데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조와 종말은 연결됩니다.

창세기에는 하늘과 땅이 창조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합니다.
창세기에는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생명나무가 회복됩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저주가 들어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는 다시 저주가 없다고 선언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창조에서 시작하여 새 창조로 완성됩니다.

18. 정리하면,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다섯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존재론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이시고 피조물은 의존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존재를 받습니다.

둘째, 통치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피조물은 그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자연 법칙, 역사, 인간의 삶, 나라의 흥망까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셋째, 언약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이루십니다. 인간은 불성실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넷째, 예배적 관계입니다. 피조물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배하도록 창조되었고, 참 예배 안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합니다.

다섯째, 구속사적 관계입니다. 피조물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셨고, 마지막 날에 만물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일부가 아니시며, 피조물과 경쟁하는 한 존재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피조물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며, 그분께로 돌아갑니다.

인간의 비극은 피조물임을 거부하고 창조주의 자리에 서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다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자리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굴욕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세계는 세계다워지며, 예배는 예배다워집니다.

보수적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최종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피조물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받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타락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한 피조물을 구속하시며,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시고, 마지막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창세기 1장

1. 개요


창세기 1장은 창세기의 시작이자 서막에 해당합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되고 반드시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신약적 관점으로 읽으면 더욱더 좋습니다. 하여튼 창세기 1장은 바로의 질문인 '여호와 누구기에?'라는 질문의 답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그는 누구일까? 그 질문의 답이 창세기이고,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 1장을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2. 강해


1-2절 태초에 하나님

  •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처음에(베레쉬트)는 '처음'이란 뜻이다. 베는 히브리어 베트이며, 시간과 장소를 의미한다. 로쉬는 '머리''장자''처음' 등의 의미다. 베레쉬트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처음'이란 뜻이다. 하지만 처음은 첫번째라는 뜻이 아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란 의미로 '아루 오래된'이란 뜻이로 해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셨다. 천지는 한 단어가 아니라 '하샤마임'과 '하 에레츠'로 그하늘들과 그 땅이다. 샤마임은 하늘의 복수형태이다. 이건 여러 하늘들이란 뜻이 아니라 고대 히브리인이 갖는 하늘에 대한 관념이다. 그들은 하늘들이 최소한 3층이 있다고 믿었다. 7단계로 주장하는 이들도있다.


창세기 1장을 유심히 읽어보면 지구의 창조가 없다. 곧바로 빛이 있고, 2일째는 물과 물 사이를 갈라 공간을 만든다. 과도하게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은 대단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필자는 1절에 '그 땅(에레츠)'를 지구의 창조로 본다. 하여튼 1장의 창조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2절로 넘어가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다. 혼돈은 질서가 없다는 뜻이며, 공허는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1장의 창조가 무에서 유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본다면 혼돈과 공허는 처음을 뜻하며, 아직 사람이 살 수 없는 원시적 상태임을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성경 속에서 '공허'와 '혼돈'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또는 저주의 결과로 자주 사용된다.


  • 예레미야 4: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 이사야  24:1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 이사야 34:11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 이사야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창조의 관점에서 공허와 혼돈은 저주가 아닌 시작의 상태로 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죄로 인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때도 저주의 사용된다는 점은 창조의 시작과 저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두 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읽는다. 또한 언제든지 다시 태고적 혼돈과 공허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이 흙이듯 창조전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다. 창세기 7장에서 홍수로 인해 혼돈의 세계가 되었다는 점은 인간의 죄가 반(反)창조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3-5절 첫째날의 창조


  •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창세기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 창세기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첫째날의 창조는 '빛(오르 אור)'이다. 이 빛은 후에 나오는 광명체와는 성질이 다르다. 학자들 간의 적지 않은 논란의 중심에 3절의 빛이다. 태양이 없는 상태에서 빛으 가능할까 때문입니다. 최근들어 학자들은 북극의 오로라처럼 태양이 없어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과연 모세는 태양 없는 빛을 말하고 싶어서 3절을 넣은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출애굽의 재앙의 하나가 흑암 재앙이라는 점은 빛의 아들이 파라오가 가짜 신임을 드러내는 재앙이자 심판이었다. 빛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의 빛을 현대인의 관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부름은 곧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존재가 있다. '빛이 되었다'가 아니라 '빛이 있었다(ויהי־אור)'는 과거형(히 미완료)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말씀은 곧 존재이다. 말씀이 전부라는 사실을 말한다. 출애굽은 신관념에 대한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애굽은 보이는 형상을 신이라 불렀다. 고대 사람들은 신이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죽었다. 하여튼, 히브리인들은 보이는 신은 가짜이고, 말씀하시는 신이 진짜임을 믿어야 했다. 보는 종교에서 듣는 종교로의 혁명적 변환이 일어난다.


보시기에 좋았다. '좋다'는 히브리어 토브는 '선''완전' 등에 사용된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로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뢰이자 만족이며 감사이다. 죄는 하나님의 베품에 대한 불만족이다.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조는 섞인 것을 분리하여 나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구분하여 질서를 세우고, 모든 것을 각자의 소명을 준다. 낮과 밤을 분리하듯, 이후에 물과 물을 분리하고, 물과 땅을 구분 짓는다. 구분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을 위한 것이다. 태양은 낮을 빛을 발하고 낮을 주관한다. 달은 밤을 주관한다. 이처럼 구분은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가는 건축술이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름이 된다. 이름은 곧 존재의 규명이자 한계을 설정한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부름으로 이름대로 살아갈 소명을 받는다. 이것이 이름의 신학이 갖는 핵심이다. 성경 안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종종 선택 받은 백성됨과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후에 이 부분은 따로 [ #이름의신학 ]이란 주제로 따로 다룰 것이다.


  • 이사야 40장26절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 이사야 41장25절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 이사야 65장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 사도행전  2장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 고린도전서  1장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첫째 날은 빛을 창조하심으로 어둠과 구분하신다. 빛이 없다면 어둠도 없을 것이다. 창조는 존재하게 함으로 무를 드러낸다. 무는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라 그냥 무인 것이다. 존재 만이 무를 드러내며, 빛을 있어야 어둠을 드러낸다.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신학을 '빛'의 개념에서 설명한다는 점도 유의하여 볼 만한다. 하나님은 빛이고, 예수님을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3장 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요한1서 1장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8절 둘째날의 창조


  • 창세기 1: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둘째 날의 창조는 궁창 즉 공간이다. 공간은 물과 물 사이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위의물과 아랫물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정한 장소이다. 홍수 때 두 장소의 물이 합해진다. 하지만 그 공간은 하나님께서 붙드시므로 안전하다. 무엇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공간은 인간의 불안정한 인간의 실존을 표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붙듬으로 안전하게 된다.


하나님은 공간을 하늘(샤마임)이라 부른다. 둘째 날의 창조는 섞인 것들을 분리함으로 공간을 만든다. 결국 이러한 이러한 공간은 다시 채워진다. 창조는 텅빔에서 채움으로 나아간다. 사람을 창조한 이후 이 땅에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의미는 창조를 완성하라는 의미다.


9-13절 셋째날의 창조


  • 창세기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 창세기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셋째 날의 창조는 출애굽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날은 빛을 만드시고, 둘째 날은 물을 갈라 공간을 만들고, 이젠 아랫물속에 있는 땅을 불러 내신다. 9절에 등장하는 뭍이란 표현은 히브리어로 '하바바샤브'로 말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4:9과 요나 1:9에서 사용되어 사람들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 절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물 속에서 '마른  땅'을 드러내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땅은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이다. 에덴 동산은 물 속에서 불러낸 땅 위에 세워진다.


10절에서는 이 뭍을 '땅(에레츠)'로 부르신다. 에레츠는 지구라는 의미와 함께 이스라엘이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기업으로 자주 번역되는 단어로 상속되어야할 재산의 개념이 강하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기업(에레츠)이다. 이스라엘을 에레츠이스라엘라 부르는 이유이다.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을 망각하면 안 된다.


땅에게도 소명이 주어진다. 땅은 씨(제라) 맺는 식물을 내야 한다. 씨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각기 종류대로는 분리와 나눔의 법칙에 속한다. 인간의 성장과 비교하면 창조의 순서와 매우 닮아있다. 처음엔 아무런 기능도 없는 줄기세포지만 분열하는 과정을 통해 각지 다른 세포로 성장한다.


14-19절 넷째날의 창조


  • 창세기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창세기 1: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 창세기 1: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 창세기 1: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넷째 날부터는 이전의 삼일 창조와 대칭을 이루며 채움으로 이어간다. 넷째날은 첫날과 대응한다. 첫날 빛을 만드신 하나님은 넷째날 공창에 광명체를 만드심으로 빛을 발하게 하신다. 넷째날이 되서야 드디어 우리가 아는 공전과 자전을 통해 자연의 법칙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계절과 나로가 해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징조는 약간 모호다. 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뜻을 포함하지만 어떤 의인지 부정확하다.


'징조(오트 אוֹת)'라는 던어는 영어 sign과 다른 말이 아니다. 표시 또는 징조로 해석되는 평범한 단어다. 마태는 이 구절에서 종말의 징조를 가져왔느지 모를 일이다.


  • 마태복음 24장 30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광명체들이 하는 일은 빛을 비추는 일이다. 빛을 비춤으로 땅의 만물은 형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16절의 주관한다는 말은 통치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궁창의 빛 아래 두신다. 인간은 하늘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영향을 받는다. 비가 내리면 비를 피할 수없고, 어둠이 찾아오면 막을 방도가 없다.


'궁창에 두었다'(14, 17절)는 장소적 의미로 그곳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말이다. 태양은 자신의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가야한다. 이것이 태양의 운명이다. 운명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명에 관련된 것이다. 넷째 날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20-23절 다섯째날의 창조


  • 창세기 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 창세기 1: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다섯 째날은 둘째 날과 대응한다. 둘째날은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다섯 째날은 아래의 물과 물과 사이의 공간을 채우신다. 아랫물에는 물고기로 채우시고, 위의 궁창은 새들로 채우신다.


넷째 날에 번성이란 단어가 네 번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더 계속하여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직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다. 남겨진 부분을 채워가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광명체 등은 '비추라'는 소명의 의무가 주어지지만 생물에 대해서는 번성하여 충말하라는 다른 의미의 소명이 주어짐을 발견한다. 교회는 생명의 공동체이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해야할 의무를 갖는다. 교회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24-31절 여섯째 날의 창조


  • 창세기 1: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 째날은 동물과 사람의 창조이다. 여섯 날은 땅 위에 존재에 대해 이루어지며, 서로 닮아 있다. 먼저 동물은 식물처럼 땅에게 명령한다. 짐승도 땅에게 명령하여 종류대로 내라 하신다. 짐승과 가축, 등은 용어의 차이로 야생과 사람의 손에 길러질 가축을 대변한다. 이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 창세기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마지막 사람의 창조는 특이하다.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며, 이미 존재한 것으로부터 확장되어 창조된 것이다. 물론 사람도 그렇다. 하지만 창세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특별한 관심과 합의, 사랑의 결과로 창조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형상과 모양(첼렘과 테무스)은 이후 번역을 살펴도 크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아마도 비슷한 단어를 통해 강조 또는 언어유희를 사용했을 것이라 학자들을 추측한다. 핵심은 '우리의 모양과 우리의 형상' 즉 '우리'라는 표현에 방점에 찍힌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의 피조물 설명과는 상당히 다른 표현이다.

사람의 창조 목적은 지금까지 지은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26절 하)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 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한다. 이것은 동물의 창조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람은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 추가된다. 즉 생물의 지배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또한 셋째 날 창조 된 채소가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된다. 육일째의 창조는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함으로 둘째 날에 빠진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추가함으로 7번을 채운다. 이렇게 육일의 창조는 마무리된다.

창세기 장별요약 및 강해 목록


창세기 개요 및 장별 요약

 창세기 개요 및 장별 요약

창세기의 간략한 역사

창세기는 성경에 가장 앞 부분에 위치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족장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날 안식을 갖습니다.(1-2장) 얼마 인간이 타락을 하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3장) 에덴동산 밖에서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제사를 지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받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죽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유리하는 벌을 받지만 거역하고 놋(유리하는 땅이란 뜻)에 성을 쌓고 자신의 아들인 에녹이란 이름을 붙입니다.(4장) 이후 가인이 후손들이 번성하는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허락하고, 셋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번성해 나갑니다.(5장) 이후 인간이 번성하자 극도로 타락하여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오직 노아와 그 가족만을 방주를 짓게하여 피하게 한 다면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멸하십니다.(6-8장)


홍수 이후 노아는 방주에서 내려와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다시 축복하고 노아는 땅으로 내려와 포도 농사를 짓습니다. 포도주를 마신 노아가 옷을 벗고 술에 취해 눕자 그 모습을 함이 보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셈과 야벳을 뒷걸음쳐 노아를 천으로 덮어 줍니다. 이일로 함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후 사람들은 다시 번성해 갑니다.(9-10장) 동쪽으로 옮기다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강림해 그들을 흩으십니다.(11장)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허락하십니다. 아브람과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가나안으로 갑니다.(12장) 결국 아브람은 100세가 되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삭(뜻 웃음)이라고 짓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명의 아들과 딸 디나를 낳습니다.(29-30장) 요셉의 11한 번째 아들인 야곱이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 갑니다. 하지만 온갖 고생을 하다 30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온 땅에 기근이 들자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내려온 요셉의 형들을 요셉이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알리지 않았지만 후에 형들을 테스트하고 용서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결국 요셉과 형들을 화해를하고 모든 가족을 애굽으로 내려옵니다.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고 노년을 평화롭게 살다 자녀들을 축복하고 숨을 거둡니다. 요셉도 후손들에게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고 가나안으로 인도해 갈 것이라고 말하며, 그 때에 자신의 뼈를 추스려 가나안에 묻어달라고 부탁합니다.(50장) 그렇게 창세기를 막을 내립니다.



창세기 구조

창세기는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두는 1-11장까지로 족장시대 이전의 역사를 다룬 창조에서 바벨탑까지의 사건입니다. 이후는 족장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족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요셉까지 포함해야 맞지만 정서상 요셉은 족장에서 빠집니다. 이 부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고 오늘은 간략하게 장별로 요약하려고 합니다.

1-11장 창조시대

12-50장 족장시대


창세기 장별 요약

창세기 1장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를 말합니다. 창조를 6일 동안 이루어지며 마지막 7일째는 안식합니다. 첫째날은 빛을 만들고, 둘째 날은 공간(궁창)을 만들고, 셋째날은 물 속에서 땅을 불러냅니다. 넷째날은 궁창에 광명체를 만듭니다. 다섯째날은 물 속의 고기와 궁창에 새를 만듭니다. 마지막 여섯째날은 땅 위에 동물과 사람을 만듭니다. 창조는 6일동안 끝나지만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7일째 안식함으로 창조가 완성됩니다.


창세기 2장

창조 완성후 7일째 되는 날 안식했다는 말로 2장이 시작됩니다. 이후 배경은 다시 6일째의 인간의 창조로 되돌아 갑니다. 1장에서는 간략하게 남녀를 창조했다는 표현만 등장하지만 2장에서는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창세기 3장

3장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타락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아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아래 있을 때 뱀이 찾아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합니다. 이후 하와는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주어 먹게 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무화과 잎을 만들어 중요한 부분을 만들어 가립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자 나무 뒤로 숨어 들어갑니다. 타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결국 하나님은 유혹한 뱀을 저주하고, 영원토록 기어다니고 흙을 먹고 살게 만듭니다. 그 다음 여자에게는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더하고, 마지막 남자에게는 수고롭게 일하도록 만듭니다. 결국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창세기 4장

4장은 최초의 살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동침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첫 아들은 가인이고, 둘째 아들은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고, 아벨은 양을 키우는 목자가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두 사람이 드린 예물은 가인은 자신이 키운 농사물로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지만 가인의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습니다. 이에 가인은 화가납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와 죄를 다스리도록 권면합니다. 하지만 결국 가인은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땅에서 유리하는 저주를 내립니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놋(유리하는 곳이란 뜻) 땅에 자신의 아들인 에녹이란 성을 쌓고 거주합니다. 결국 가인의 후손들은 문명을 만들지만 점점 타락해 갑니다.


창세기 5장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족보가 소개됩니다. 족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노아가 오백 세 때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됩니다. 5장의 족보는 가인과 아벨을 대신한 셋의 죽보이며, 셋을 통해 후손이 어떻게 번성하는가를 보여줍니다. 

  • 아담-셋-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

5장에서 주목한 인물은 에녹과 노아입니다. 에녹은 자녀들을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갑니다.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간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살로 가장 오래 살고, 홍수가 나던 해에 죽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아를 소개하며 족보는 끝이 납니다. 노아의 뜻은 휴식이란 뜻입니다. 창세기 5장은 해석상의 많은 논라이 있고, 묵상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시기는 가인의 후손들 또한 크게 번생해 가는 시기였습니다. 이 부분은 6장 초반부에 다룹니다. 인간이 극도로 타락하고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을 그려줍니다.


창세기 6장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는 홍수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극도로 타락하자 하나님은 깊은 한탄을 하십니다. 이때 노아만아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짓게 하고 방주의 설계도를 그려줍니다. 


창세기 7장

드디어 홍수가 시작됩니다. 홍수가 시작되기 일주 전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들과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문이 닫힙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홍수가 시작됩니다. 이때 노아의 나이는 600세입니다. 홍수는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의 둘째 달 열이렛(17)날 시작됩니다. 40일 동안 큰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이 열려 비가 내립니다. 이후 땅에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은 죽임을 당합니다. 참고로 물고기는 죽지 않습니다. 150일 동안 물이 땅에 넘쳐납니다.


창세기 8장

노아는 홍수가 끝나고 아라랏산에 내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홍수후 150일(5달) 이후 물이 줄기 시작합니다. 일곱째 달 17일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뭄니다. 열째 달 1일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노아는 까마귀를 풀어 놓습니다. 이후 비둘기를 내 놓습니다. 비둘기는 땅이 발 디딜 곳이 없어 다시 돌아옵니다. 다시 7일 후에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이 때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가져옵니다. 다시 칠일 후에 비둘기를 내 보내자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601년 1월 1일, 땅 위에 물이 걷힙니다. 둘째 27일 땅이 마릅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노아와 가족들을 방주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 곧바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드립니다. 


창세기 9장

제사를 흠향한 하나님은 노아에게 새로운 언약을 주십니다. 다시는 땅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하늘의 무지개를 증거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언약은 창세기 1장에서 아담에게 준 언약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래서 노아언약은 보존언약이라 부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주 농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마신 노아가 벌거벗고 잡을 잡니다. 이 모습을 발견한 함이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모습을 놀립니다. 소식을 들은 셈과 야벳은 뒷걸음쳐서 가사 옷으로 노아의 하체를 덮어 줍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포도주 사건은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950세까지 장수하고 사망합니다. 노아의 사망 나이는 므두셀라 다음으로 많습니다.


창세기 10장

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창세기 5장이 족보는 셋에서 노아까지의 단일 족보라면, 10장의 족보는 현재(출애굽) 시기의 민족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나안을 중심으로 민족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함의 후손인 구스, 미스라임(애굽) 붓, 가나안입니다. 또한 구스에게서 니므롯을 낳았다고 소개함으로 함의 자손들에게 셈의 자손들이 핍박을 받게 된다는 역사적 전제를 제공합니다. 니므롯은 시날 땅의 바벨, 앗수르, 니느웨 등을 건설합니다. 미스라임은 애굽의 히브리어입니다. 후에는 애굽으로 번역하지만 히브리어는 미스라임입니다. 왜 애굽으로 번역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70인경의 영향으로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11장

족보가 끝난 후 곧바로 시날 평지로 사람들이 옮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시날 평지를 만나 그곳에서 바벨탑을 쌓고 흩어짐을 면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벽돌을 굽고 역청을 발로 거대한 성을 쌓습니다. 그들의 목적을 '도시'(11:8)입니다. 성경은 에덴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도시)로 끝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11장 해석을 참고 바랍니다. 하나님은 강림해 이들의 시도를 무마시키고 세상에 흩어 버립니다. 이후 셈의 족보가 소개되고 아브라람과 사래가 아이가 없는 상태로 소개됩니다.


창세기 12장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릅니다. 아브람은 말씀을 쫓아갔고, 조카 롯도 함께 떠납니다. 가나안에 도착할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입니다. 25년 후인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게 됩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이후 기근이 일어나자 애굽(미스라임)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의 왕 파라오(바로)는 사라를 아내로 데려가고 대신 아브람에게 많은 재물을 허락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자 바로가 깜짝 놀라 아브람을 불러 왜 거짓말 했냐며 야단을 치고 애굽에서 쫓아냅니다. 이후 많은 재물을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적은 야곱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갔다 모세를 통해 다시 출애굽한 역사적 사건의 전조로서 메타포를 형성합니다.


창세기 13장

애굽으로 올라온 아브람과 조카 롯에게 문제가 일어납니다. 갑자가 부유해지고 많은 가축이 생기자 아브람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결국 아브람은 롯을 불러 땅이 좁으니 서로 떨어져 살자고 제안하고 롯에게 먼저 고르라고 말합니다. 롯은 '동쪽'의 요단들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떠납니다. 풀이 많고 물이 있어 가축을 기르기 좋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곳에 있는 소돔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13:13)이라고 말하며 롯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롯이 떠나고 홀로 고독한 아브람을 찾아온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둘러보라 명하시고, 그 땅을 모두 아브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롯은 오직 동쪽만 봤지만 아브람은 동서남북 모두를 보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창세기 14장

아브라함과 헤어진 롯은 요단들에서 살아다 점점 소돔 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히 이때 그돌라오멜 연합군과 소돔 연합군간의 전쟁이 일어나 롯은 끌려가고 맙니다.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사병 318명을 이끌로 롯을 구해 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후에 예루살렘) 왕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은 십분의 일을 살렘 왕에게 드립니다.


창세기 15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상속자에 대해 묻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하늘의 별처럼 후손이 많을 거라 약속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요구하시고, 햇불언약을 맺습니다.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있다 다시 돌아올 것이라 약속합니다.


창세기 16장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몸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합니다. 그 때는 가나안에 들어온지 십년이 넘었을 때입니다.(3절) 하갈이 임신하자 사래를 무시합니다. 사래를 화가나서 하갈을 내쫓고 맙니다. 광야에서 하갈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약속을 받고 되돌아 옵니다. 그후 아들을 낳고 이스마엘이라 부릅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팔십육 세였습니다.(16절)


창세기 17장

17장으로 넘어가며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과 사래의 이름을 바꿔줍니다.

아브람 ➡ 아브라함, 사래  ➡ 사라

하나님은 모든 가족들에게 태어나면 팔 일 만에 할례를 명합니다. 소위 할례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후사를 낳는다는 말에 사래고 웃자 하나님이 들으시고 '웃음'이란 뜻의 이삭을 이름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차는 14년이 되겠네요.


창세기 18장

어느 날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나무에 있을 세 명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하나님과 천사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다시 후사를 약속하고 소돔의 죄악을 보고 심판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의인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후 더 요구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9장

소돔에 도착하자 롯이 극진히 대접합니다. 하지만 소돔사람들이 외부인인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야단을 칩니다. 결국 천사들을 그들의 눈을 멀게하고 롯에게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라고 말합니다.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가지 않고 두 딸와 롯고 아내만 빠져 나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어기고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됩니다. 롯은 두 딸과 관...하여 모압과 벤암미를 낳습니다. 이들은 후에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창세기 20장

20장은 12장 후반부 애굽으로 내려갈 때와 닮아 있다. 가데스와 술 사이에 거할 때 아브라함을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 속인다. 아베멜렉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데리고 간다. 하나님께 현몽하여 죽이려하자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4절) 말한다.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 돌려준다.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은 천 개를 준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 준다. 그러자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이 출산한다. 태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이 소개된다.


창세기 21장

드디어 사라가 이삭을 낳는다. 사라를 낳은 후 할례를 행한다. 아마 몇 년이 지났을 것이다. 사라는 이스라멜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쫓아낸다. 처음엔 스스로 나갔지만 이젠 사라에 의해 쫓겨난다. 아브라함은 힘들어하지만 하나님이 보내라고 하신다. 이일 후에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다. 아브라함을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창세기 22장

적어도 13년 이상 흘렀을 것이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한다. 삼일동안 걸어서 모리아산에 도착해 제단을 쌓고 이삭을 바치려 한다. 그때 천사가 나타난 말린다. 아브라함은 주변에서 수풀에서 숫양을 발견하고 이삭을 대신해 제사한다. 이 때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14절)라 한다.


창세기 23장

127세가 된 사라가 숨을 거둔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헷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사서 장사한다.


창세기 24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 하란으로 종을 보내 아내될 리브가를 얻어 온다. 리브가가 가나안에 도착할 때 이삭은 들에 나가 묵상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낙타에서 너울로 자신이 얼굴을 가린다. 두 사람은 결혼한다.


창세기 25장

아브라함은 후처 그두라를 얻고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얻는다. 이후 175세에 숨을 거둔다. 이삭은 아브라함을 이스마엘고 함께 막벨라 굴에 장사한다. 이스마엘의 족보가 나온다. 이후 리브가는 이스마엘과 야곱을 낳는다. 야곱은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올 때 팥죽 한그릇과 장자권을 바꾼다.


창세기 26장

가나안에 다시 흉년이 든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막는다. 이삭은 블레셋으로 간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인다. 어느 날 아비멜렉이 두 사람이 껴안은 장면을 발견하고 나무란다. 

이삭은 농사를 지어 백 배나 얻어 거부가 된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막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다시 우물을 파고 또 와서 막아 버린다.  마지막 장소에서는 싸우지 않아 르호봇이라 한다. 이후 브엘세바로 내려간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이삭에게 복을 주어 번성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한다. 이후에 아비멜렉이 찾아와 이삭과 언약을 맺는다. 아브라함에게 했던 짓을 또 한다. 에서가 40세에 아내를 얻지만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 거리가 된다.


창세기 27장

이삭이 에서를 불러 축복하려고 사냥을 해서 요리를 하라한다. 리브가가 이 말을 듣고 야곱을 꾸며 요리를 만들어 들여 보낸다. 이삭은 잘 보지 못하고 이삭에게 축복을 받는다. 나중에 에서가 들어와 야곱이 자신을 복을 속여 취했다는 것을 알고 죽이려 한다. 결국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하란으로 보낸다.


창세기 28장

하란으로 올라가다 루스라는 곳에 들러 꿈을 꾸다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야곱을 깨어나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이란 이름을 짓는다.


창세기 29장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은 라헬을 얻는다는 조검은 7년 동안 무료로 봉사한다. 그리고 결혼식을 치른다. 그런데 일어나보니 레아였다. 라반에게 가서 따지자 고을 풍습이라면 라헬을 얻고 싶다면 다시 7년을 더 봉사라 말한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칠년을 더 봉사한다. 자녀들을 낳기 시작한다. 르우벤(레아) 시므온(레아) 레위(레아) 유다(레아)를 낳는다.


창세기 30장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몸종 빌하는 야곱에게 준다. 빌하는 단을 낳고, 또 납달리를 낳는다. 이번에 레아가 자신의 시년 실바를 야곱에게 준다. 실바는 갓, 아셀 을 낳는다. 이후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합환채를 가져오자 그것을 라헬에게 주고 야곱을 요구한다. 이후 레아는잇사갈을 낳고, 또 스불론을 낳는다. 마지막으로 딸 디나를 낳는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열어 요셉을 낳는다. 이때 야곱과 라반의 가격 재협상이 이루어지고 6년 동안 라반의 양을 치면서 수많은 재산을 불리게 된다.


창세기 31장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가나안으로 돌아가 꿈에 나타난다. 야곱은 야반도주를 하지만 곧 라반이 추격한다. 하나님은 라반의 꿈에 나타나 경고한다. 라반과 야곱은 서로 만나 화해한다. 라반은 라헬이 훔쳐간 드라빔을 찾지만 실패하자, 돌을 쌓고 언약하면 서로 이 돌을 넘지 말자 약속한다. 라반은 그곳 이름을 여갈사하두다,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 미스바라 불린다. 여갈사하두다와 갈르엣 모두 '증거의 무더기'란 뜻이다.


창세기 32장

가나안으로 돌아간 야곱에 한 가지 골칫거리가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에서가 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천사의 무리를 만나고 그곳을 마하나임(두 진영)이란 이름을 붙준다. 에서를 만나기 직전 얍복강에서 야곱은 홀로 남아 천사와 씨름한다. 천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골절시킨다. 하지만 야곱은 마지막까지 복을 구한다. 천사는 그에게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새이름을 준다. 


창세기 33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기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음 날 에서는 만나지만 너무나 반갑게 맞아 준다. 아마도 야곱이 선물로 준 가축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 뜨린 것이 확실하다. 야곱은 세겜으로 가서 장막을 치고 밭을 사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의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붙인다.


창세기 34장

디나가 세겜성에 구경하러 갔다 세겜의 추장인 세겜이 디나는 끌여들여 강간한다. 이후 아버지 하몰을 찾아가 디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이 소식을 디나의 오빠들이 듣고 격분한다. 결혼을 약속한 조건으로 세겜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게 한다. 이 때 디나의 두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 들어가 세겜성의 모든 남자를 살인하고, 다른 형제들은 같이 들어가 물건을 노략하는 죄를 짓는다. 야곱이 이것을 알고 야단을 치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창세기 35장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야곱에 나타나 벧엘로 올라가라 명한다.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야곱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내고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야곱의 가족들은 모든 우상을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한다. 이때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숨을 거둔다. 벧엘 상수리 나무 아래 묻는다. 야곱이 에브랏(베들레헴)을 지날 때 라헬이 산고를 겪다 아들을 낳고 죽은다. 야곱은 라헬의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짓는다. 야곱은 기럇아르바 마므레 상수리 나무에 이른다. 그곳에 이삭이 살고 있었다. 얼마 후 이삭이 18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창세기 36장

에돔의 족보가 소개된다. 에서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모아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에서는 세일 산으로 간다. 페드라(바위) 지역은 에돔은 대부분이 돌이고 요새처럼 거대한 바위로 되어 있다. 이후 에서의 후손들과 에돔 왕들이 목록이 소개된다.


창세기 37장

요셉이 십칠 세가 되었을 때 꿈을 꾼다. 한 번은 곡삭 단이 절을 하고, 두 번째는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을 하는 꿈을 꾸고 그것을 형들에게 부모와 형들에게 한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는데 요셉의 꿈 때문이 기분이 상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한다.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받고 형들이 있는 세겜으로 향한다. 그러나 찾아도 없자 지나는 사람에게 묻자 도단을 갔다고 말하자 도단으로 향한다. 요셉이 오는 모습을 발견한 형들은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며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고, 다시 그를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상인에게 판다.


창세기 38장

38장은 요셉 이야기가 잠깐 끊기고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 행음하는 이야기가 들어간다. 다말은 베레스를 낳는데, 베레스는 다윗의 조상이 된다.


창세기 39장

애굽에 내려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린다. 하지만 요셉을 연모한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하다 요셉이 거절하자 모함하여 옥에 가둔다. 하지만 옥에서도 지혜로운 요셉은 모든 일들을 돌보는 총리처럼 살아간다.


창세기 40장

어느 날 요셉이 있던 감옥에 바로의 술관원장과 떡관원장이 잡혀 들어온다. 그들이 꿈을 꾸고 요셉이 해석해 준다. 해석대로 술관원장으로 복직하고, 떡관원장은 목이 달린다. 요셉은 자신을 옥에서 꺼내달라고 술관원장에게 부탁하지만 잊고만다.


창세기 41장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두 가지 꿈을 꾸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다. 이대 술관원장이 바로에게 자신이 옥에 있을 히브리 남자가 꿈을 해석해준 이야기를 들려주고 요셉을 데려온다. 요셉은 바로 앞에서 꿈의 의미와 앞으로 될 일을 일러준다. 바로는 감동하여 요셉을 총리로 삼는다. 요셉의 나이 30이다. 요셉은 애굽의 제사장의 딸 아스낫와 결혼하여 므낫세와 아브라임을 낳는다.


창세기 42장

또 다시 기근 일어난다. 요셉 덕분에 애굽에는 엄청난 양식이 창고에 쌓였다. 애굽 사람뿐 아니라 주변 나라에서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온다. 요셉의 형들도 곡식을 사러 애굽에 온다. 이때 요셉이 형들을 발견하고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한다. 시므온을 가두고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 협박한다. 요셉의 형들을 이 사실을 야곱에게 말한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절대 애굽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다.


창세기 43장

양식이 다 떨어지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서 양식을 사 오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들이 베냐민 이야기를 꺼내며 아버지가 야곱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아 우리가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야곱을 고통스러워하지만 결국 모든 일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베냐민을 애굽에 보낸다. 애굽에 도착한 형들은 요셉을 만나 절하고 베냐민을 소개한다. 베냐민을 본 요셉은 감정이 복받쳐 홀로 숨어 들어가 울고 나온다. 다시 나와 형들을 만찬에 초대한다. 


창세기 44장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시간 요셉은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고 형들의 속마음을 테스트한다. 가나안으로 가고 있던 형제들을 붙잡아 은잔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고 말한다. 불행히 은잔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다. 결국 베냐민은 붙들려 애굽으로 다시 끌려갈 판이다. 이때 모든 형제가 주저하지만, 유다가 앞서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목숨으로 베냐민을 목숨을 대신하겠다 말한다.

창세기 45장

유다의 말을 듣던 요셉은 결국 자신이 요셉인 것을 드러낸다. 형들은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 한다. 요셉은 아직 흉년이 5년이나 남았으니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오라 말한다.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들은 야곱에게 말하지만 믿지 않는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애굽의 마차를 보고서야 믿는다. 결국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창세기 46장

야곱은 드디어 모든 짐을 챙겨 애굽으로 내려간다. 성경은 애굽의 두 손자까지 합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자가 모두 칠십 명이라고 소개한다.(27절) 요셉은 바로를 만나기전 가족들에게 모축업자라고 말하라고 이른다.

창세기 47장

드디어 바로 앞에 야곱의 가족들이 선다.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고 고센 땅으로 돌아기 터를 잡는다. 애굽에 기근이 더욱 심해져 사람들이 요셉을 찾아와 살려달라 애원한다. 요셉은 그들의 모든 재산을 받고 곡식을 나누어준다. 이로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된다.

창세기 48장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끼고 요셉의 두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청하여 축복한다. 그런데 차자인 에브라임을 장자의 축복을 주려하자 요셉이 손을 다시 바꾼다. 야곱이 요셉에게 '나도 알고 있다' 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차자인 에브라임를 더 크게 축복한다. 

창세기 49장

야곱은 죽음의 때가 가까워 온 것을 알고 모든 아들들을 불러 축복한다.

창세기 50장

야곱이 숨을 거두자 애굽의 방식대로 곡하고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장사한다. 이후 형들이 요셉을 두려워하여 용서해 달라고 한다. 요셉은 걱정 말라며 '내가 당신들과 당신의 자녀들을 키우겠다'말한다. 요셉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실 터인데 그 때 자신의 뼈를 거두어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청하고 창세기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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