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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하나님의 상징, 목자에 대한 성경신학적 정리

하나님과 목자에 대한  상징 성경신학적 정리

성경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는 상징은 매우 깊고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목자는 단순히 양을 돌보는 따뜻한 존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목자 이미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돌보심, 언약 백성을 향한 신실함, 왕적 통치, 광야의 인도, 잃은 자를 찾으시는 구속, 악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구원의 절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우리가 흔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시편 23편의 문장만 떠올리지만, 성경 전체에서 목자 이미지는 훨씬 더 큰 구속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목자이시며,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이시며, 양을 위하여 싸우시는 목자이시며, 마침내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로 계시됩니다.

목자 상징의 기본 의미

히브리어로 목자는 로에(רֹעֶה)입니다. 이 말은 동사 라아(רָעָה)에서 왔으며, 기본적으로 “먹이다, 돌보다, 양육하다, 인도하다,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목자는 단순히 동물을 관리하는 직업인이 아닙니다. 목자는 먹이는 자, 보호하는 자, 길을 아는 자, 위험을 대신 감당하는 자, 공동체를 책임지는 자입니다.

헬라어 신약에서는 목자를 포이멘(ποιμήν)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 역시 양을 먹이고 돌보는 사람을 뜻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 장로와 목회자의 사명을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에서 “목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목회는 본래 조직 운영이나 종교 서비스 제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을 먹이고 지키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역입니다.

성경적 목자 상징의 핵심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목자는 양을 먹입니다. 양은 스스로 좋은 풀밭과 물가를 찾기 어렵습니다. 목자는 양이 살 수 있는 장소를 압니다.

둘째,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양은 방향 감각이 약하고 쉽게 흩어집니다. 목자는 앞서 가며 길을 냅니다.

셋째, 목자는 양을 보호합니다. 늑대, 사자, 도둑, 절벽, 광야의 위험으로부터 양을 지킵니다.

넷째, 목자는 양을 소유하고 책임집니다. 성경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임시적 계약 관계가 아니라 생명과 책임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생명, 길, 안전, 양식,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고백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목자와 왕권의 관계

목자 이미지를 이해하려면 고대 근동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왕은 종종 “목자”로 불렸습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였지만, 이상적인 왕은 백성을 착취하는 폭군이 아니라 백성을 먹이고 보호하는 목자여야 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왕들도 자신을 백성의 목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이미지를 단순히 차용하지 않고 정화합니다. 성경에서 참 목자는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왕과 지도자는 하나님의 목자직을 위임받은 자일 뿐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정치 지도자, 제사장, 선지자, 왕을 모두 목자적 책임 아래 놓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주인이 아닙니다. 백성의 참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양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백성을 착취하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때, 성경은 그것을 단순한 행정 실패가 아니라 목자직의 배반으로 봅니다.

목자는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통치는 지배가 아니라 돌봄입니다. 목자는 권위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자기 영광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양의 생명을 위한 책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왕권의 성격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지만 폭군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기에 다스리시고, 다스리시기에 보호하시며, 보호하시기에 때로는 징계하시고, 징계하시기에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창세기와 족장 전승 속의 목자 이미지

성경의 첫 부분부터 목자 이미지는 깊이 등장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유목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장막과 가축과 우물과 이동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은 땅을 완전히 소유한 정착민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이동하는 나그네였습니다. 이들의 삶은 목자의 삶과 닮았습니다. 좋은 물과 풀을 찾아야 했고, 위험한 이웃 민족들 사이에서 가족과 가축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참 보호자요 인도자로 나타나셨습니다.

특별히 야곱은 말년에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창세기 48장 15절에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내가 출생한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여기서 “기르신”이라는 표현은 목자가 양을 먹이고 돌보는 이미지와 연결됩니다. 야곱의 삶은 속임수, 도피, 외삼촌 라반과의 갈등, 가족의 상처, 요셉 상실의 고통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하나님이 자신을 “길러 오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목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완전해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불안하고 계산적이며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깨뜨리고, 인도하고,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목자 하나님은 완성된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라, 미숙하고 흔들리는 사람을 끝까지 빚으시는 분입니다.

출애굽 사건과 광야의 목자 하나님

목자 상징은 출애굽 사건에서 더욱 강력해집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길을 선택할 수 없었고, 자기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왕이시며 동시에 목자이십니다.

시편 77편 20절은 출애굽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출애굽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양 떼를 폭군의 손에서 건져 내시는 사건입니다. 바로는 거짓 목자입니다. 그는 백성을 먹이지 않고 착취합니다. 하나님은 참 목자이십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노예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광야는 목자 상징이 가장 절실하게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길이 불분명합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습니다. 적들이 있고, 불평이 있고, 죽음의 위험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백성은 자신들이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목자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양식을 주시고, 물을 주시고, 길을 보여 주시며, 위험에서 지키십니다.

신명기 8장은 광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시험하셔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셨습니다. 목자 하나님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지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목자 하나님의 인도에는 공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훈련도 있습니다. 좋은 목자는 양이 원하는 대로만 두지 않습니다. 때로는 좁은 길로 인도하고, 때로는 쉬게 하며, 때로는 위험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은 양의 생명입니다.

시편 23편의 목자 신학

성경에서 목자 상징의 절정 중 하나는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יְהוָה רֹעִי לֹא אֶחְסָר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사르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나는 부족하지 않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라고 하지 않고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공동체의 목자이시지만, 시편 23편은 그 하나님이 개인의 생명에도 친밀하게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은 인생에 아무 결핍도 없고 아무 고난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23편 안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환경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목자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결정적 결핍이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 23편에는 목자 하나님의 사역이 단계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은 푸른 풀밭에 누이십니다. 이것은 양식과 안식의 이미지입니다. 양은 불안하면 눕지 못합니다. 사방이 안전하고 배부를 때 눕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과 안식을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고요한 물들”에 가깝습니다. 양은 거센 물을 두려워합니다. 목자는 양이 마실 수 있는 잔잔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여 줍니다.

셋째, 하나님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소생시키다”는 히브리어 슈브(שׁוּב)와 관련되어 “돌이키다, 회복시키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목자 하나님은 지친 영혼을 회복시키고, 길 잃은 영혼을 돌이키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인도는 단순히 편한 길이 아니라 바른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 때문에 인도하십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하십니다. 시편 23편에서 문법적 변화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가 나를”이라고 말하다가, 골짜기에 들어서면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직접 고백합니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은 멀리 있는 3인칭이 아니라 가까운 2인칭으로 경험됩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십니다. 시편 23편 후반부에서는 목자 이미지가 잔치 주인의 이미지로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위험에서 건져 내는 분이 아니라,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백성의 존귀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일곱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따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따르다”는 말은 단순히 뒤따라온다는 약한 표현이 아니라, 추격하듯 따라온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곧 토브(טוֹב)헤세드(חֶסֶד)가 신자를 끝까지 추적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가는 것 같지만, 더 깊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를 붙잡고 따라옵니다.

시편 23편은 목자 하나님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지만,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시입니다. 그 안에는 결핍의 가능성, 죽음의 골짜기, 원수의 위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큰 것은 목자의 임재입니다.

시편 80편과 이스라엘의 목자 하나님

시편 80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릅니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여기서 하나님은 개인의 목자일 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목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 떼입니다. 이 시편은 공동체적 탄식시입니다. 백성은 고난 가운데 있고, 하나님께 회복을 구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목자”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고, 다친 양을 치료하고, 흩어진 양을 모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80편은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는 후렴을 반복합니다. 목자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히 외적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빛이 다시 비치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목자 상징은 언제나 관계적입니다. 양에게 가장 큰 복은 목자가 있는 것입니다. 백성에게 가장 큰 심판은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회복은 “하나님이 다시 우리 가운데 목자로 서시는 것”입니다.

악한 목자들에 대한 예언자들의 고발

성경에서 목자 이미지는 위로만을 주지 않습니다. 예언서에서는 악한 목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특히 예레미야 23장과 에스겔 34장이 중요합니다.

예레미야 23장 1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여기서 목자는 유다의 왕들과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백성을 보호해야 했지만 오히려 흩어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지도자의 죄는 개인 윤리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악한 지도자는 양을 흩어지게 합니다. 백성을 불안하게 하고, 신앙을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23장은 심판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양들을 다시 모으고, 그들을 기를 목자들을 세우며, 마침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의로운 가지는 메시아 왕을 가리킵니다.

이 구조가 중요합니다.

악한 목자들의 실패
하나님의 직접 개입
흩어진 양들의 회복
다윗 계열의 의로운 목자 약속

이것은 에스겔 34장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에스겔 34장의 목자 신학

에스겔 34장은 성경 전체의 목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장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먹였습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지 않았습니다.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않았습니다.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포악으로 다스렸습니다.

이것이 악한 목자의 특징입니다. 악한 목자는 양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양을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목자직이 자기 영광, 권력, 물질, 명예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가 됩니다.

에스겔 34장의 놀라운 반전은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하나님은 실패한 목자들을 제거하시고, 자신이 친히 목자가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 목자들이 실패할 때 하나님은 자기 양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목자들의 실패가 양의 운명을 끝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양의 최종 목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목자 사역을 약속하십니다.

흩어진 양을 찾으십니다.
쫓기는 양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상한 양을 싸매십니다.
병든 양을 강하게 하십니다.
살진 양과 강한 양은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좋은 꼴을 먹이십니다.
평안히 눕게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단지 부드러운 목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목자이십니다. 약한 양을 보호하지만, 강한 양이 약한 양을 밀어내고 물을 더럽히며 꼴을 짓밟을 때 그것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의 압제와 불의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에스겔 34장은 “내 종 다윗”을 한 목자로 세우겠다고 예언합니다. 역사적 다윗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다윗 계열에서 오실 메시아 왕을 가리킵니다.

이 예언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의 “나는 선한 목자라”는 선언으로 성취됩니다.

목자와 다윗 왕조

다윗은 실제로 목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소년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외모와 키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양 떼를 돌보던 목자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십니다.

사무엘하 5장 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여기서 왕권과 목자직이 결합됩니다. 다윗은 단지 통치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양을 돌보던 경험이 있는 사람을 백성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완전한 목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밧세바 사건에서 자기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다윗 왕조 역시 죄와 실패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윗을 이상화하면서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참 목자의 그림자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시편 78편 70-72절은 다윗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끄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여기서 이상적인 목자는 두 가지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 마음의 완전함입니다. 내면의 정직함, 하나님 앞의 신실함입니다.

둘째, 손의 능숙함입니다. 실제로 인도할 수 있는 지혜와 실력입니다.

성경적 지도자는 마음만 좋아도 안 되고, 기술만 좋아도 안 됩니다. 마음의 진실함과 손의 능숙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 목회자, 부모, 교사, 공동체 리더에게도 깊은 원리가 됩니다.

이사야서의 목자 이미지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은 목자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40장 11절은 매우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 구절은 이사야 40장의 큰 문맥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40장은 포로기의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징계하셨지만, 이제 그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강한 왕이시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목자이십니다. 이사야 40장은 하나님이 열방을 통의 한 방울처럼 여기시고, 섬들을 작은 티끌처럼 드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린 양을 품에 안으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시지만 작고 약한 자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지만 어린 양 하나를 품에 안으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온유하심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참 위대하심은 약한 자를 품으시는 데서 드러납니다.

스가랴서와 목자 상징의 어두운 면

스가랴서에는 목자 상징이 더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스가랴 11장에는 악한 목자와 버림받은 양 떼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또한 은 삼십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신약은 이것을 예수님의 배신 사건과 연결합니다.

스가랴 13장 7절은 말합니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예수님은 마태복음 26장 31절에서 이 말씀을 자신의 체포와 제자들의 흩어짐에 적용하십니다. 목자가 맞으면 양이 흩어집니다. 십자가 직전 제자들의 도망은 단순한 인간적 비겁함만이 아니라, 스가랴 예언의 성취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목자 이미지는 고난의 이미지를 갖습니다. 참 목자는 양을 위해 맞고, 버림받고, 찔립니다. 하나님의 목자직은 단순히 강한 보호자의 이미지에서 멈추지 않고, 대속적 고난으로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장은 신약에서 목자 신학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헬라어로 “선한”은 칼로스(καλός)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참되며 본래 목적에 합당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참되고 아름답고 완전한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삯꾼과 대조하십니다. 삯꾼은 양이 자기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면 도망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여기서 목자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참 목자는 위험이 올 때 드러납니다. 평안할 때는 목자와 삯꾼이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리가 오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삯꾼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양을 버리고,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립니다.

예수님의 목자직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님은 양을 아십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알다”는 단순한 정보 인식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 상처, 두려움, 연약함, 길을 아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양을 부르십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부르심과 제자의 순종을 나타냅니다. 참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 이미지의 절정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친히 목자가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그 약속을 자신 안에서 성취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선한 목자와 십자가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목숨을 버린다”는 표현을 반복하십니다. 이것은 우연한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제로 빼앗기는 희생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는 목자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십자가는 선한 목자의 목자직이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목자는 양을 살리기 위해 죽습니다. 양이 받아야 할 심판을 목자가 담당합니다. 양이 통과해야 할 죽음의 골짜기를 목자가 먼저 통과합니다.

여기서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이 깊이 연결됩니다. 시편 23편의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는 그 골짜기에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하셨기에 신자는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목자 이미지는 감상적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목자는 십자가의 목자입니다. 그는 양을 쓰다듬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양을 삼키려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 앞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큰 목자

히브리서 13장 20절은 예수님을 “양들의 큰 목자”라고 부릅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

여기서 예수님은 죽으신 목자일 뿐 아니라 부활하신 목자입니다. 그는 양을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목자직은 언약과 연결됩니다. 그는 새 언약의 피로 양들을 사셨습니다. 양들은 우연히 모인 군중이 아니라, 피로 값 주고 사신 언약 백성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도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목자이며 감독입니다. “감독”은 헬라어 에피스코포스(ἐπίσκοπος)로, 돌보고 살피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목자이시며, 방황하던 양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에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장로들과 목회자들은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양을 돌보는 작은 목자들입니다. 그들의 권위는 독립적 권위가 아니라 위임된 권위입니다.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비유는 목자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찾을 때까지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찾으면 즐거워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한 영혼의 소중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영접하신다는 비난에 답하시며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저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행동이 목자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잃은 양은 스스로 돌아올 힘이 없습니다. 목자가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신학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길을 찾아 하나님께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길 잃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찾은 양을 책망하며 끌고 오지 않고, 어깨에 메고 기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차가운 법적 절차만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늘에서 기쁨이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음성을 듣는 신앙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의 중요한 특징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성경적 신앙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삶입니다. 여기서 음성은 주관적 감정이나 신비 체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양은 목자의 말씀을 통해 길을 압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관계의 친밀함을 뜻합니다. 낯선 자의 음성은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별의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음성이 있습니다. 욕망의 음성, 두려움의 음성, 거짓 목자의 음성, 시대정신의 음성, 자기 의의 음성, 절망의 음성이 있습니다. 신자는 그 가운데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 묵상, 기도, 순종, 공동체적 분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반복적으로 들을수록 그 음성에 익숙해집니다. 신앙의 성숙은 결국 주님의 음성을 더 정확히 알아듣고 따르는 능력입니다.

목자 상징과 교회론

교회는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양 떼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종교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양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교회는 지도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목회자의 소유도 아니고, 장로의 소유도 아니며, 특정 가문의 소유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교회를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은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목회자의 세 가지 위험이 드러납니다.

첫째, 억지로 하는 사역입니다. 소명 없이 의무감과 체면만으로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둘째, 더러운 이득을 위한 사역입니다. 양을 물질과 명예의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셋째, 주장하는 자세입니다. 양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태도입니다.

참 목자는 목자장이신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양을 위해 자신을 주셨듯, 교회의 목자들도 양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방향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목자 상징과 성도의 삶

성도는 먼저 자신이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양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양은 의존적이고 약한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양으로 묘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쉽게 두려워하고, 쉽게 흩어지고, 쉽게 유혹받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죄는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목자의 길이 아니라 자기 길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목자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목자의 인도를 신뢰하는 삶입니다. 때로 목자는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때로 목자는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지만,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길의 난이도가 아니라 목자의 임재입니다.

신자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목자는 아신다.
내가 내일을 보지 못해도 목자는 앞서 가신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해도 목자는 나를 지키신다.
내가 넘어져도 목자는 나를 회복시키신다.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도 목자는 나와 함께하신다.

이 고백이 목자 신앙입니다.

목자 상징과 하나님의 징계

목자 하나님의 돌보심에는 징계도 포함됩니다. 시편 23편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보호와 교정의 도구입니다.

목자는 막대기로 맹수를 쫓기도 하지만, 양이 위험한 길로 갈 때 돌이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 양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목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냥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막으시고, 낮추시고, 기다리게 하시고, 실패를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균형입니다. 목자 하나님을 오직 위로와 공급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하면 신앙이 유아적으로 됩니다. 참 목자는 양의 성숙을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길을 교정하십니다. 그 징계는 파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목자 상징과 종말론

성경의 마지막에서도 목자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은 놀라운 말씀을 전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서 역설이 나타납니다. 어린 양이 목자가 됩니다. 보통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죽임당한 어린양이 목자가 되어 성도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목자 신학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깊이 완성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양처럼 죽임당하셨지만, 부활하셔서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는 희생당한 어린양이면서 동시에 구원하는 목자입니다.

종말의 목자는 더 이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더 이상 눈물이 없습니다. 더 이상 굶주림도 목마름도 없습니다. 태양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회복 예언과 시편 23편의 목자 이미지가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최종 소망은 목자 없는 자유가 아닙니다. 최종 소망은 완전한 목자의 완전한 돌보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자율적 개인들의 독립 공간이 아니라, 어린양 목자의 생명 안에서 완전히 보호받고 만족하는 나라입니다.

목자 상징의 핵심 신학 정리

성경 속 목자 상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생명의 공급자이십니다. 그는 양에게 꼴과 물을 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길의 인도자이십니다. 그는 양보다 앞서 가십니다. 신앙은 목자의 뒤를 따르는 삶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위험 속 보호자이십니다. 이리와 도둑과 죽음의 골짜기 앞에서도 양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양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양을 찾으십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악한 목자들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양을 착취하는 지도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목자가 되신 분입니다. 에스겔 34장의 약속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성취됩니다.

일곱째, 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입니다. 그의 목자직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여덟째, 성령은 오늘도 교회 안에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양들을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아홉째, 교회의 목회자는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아래 있는 위임된 목자입니다. 목회는 지배가 아니라 돌봄이며, 착취가 아니라 희생입니다.

열째, 종말에는 어린양이 영원한 목자가 되어 성도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결론

성경에서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감상적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깊은 언약적 언어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소유하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찾으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나 목자 상징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언을 십자가에서 이루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위로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양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길을 스스로 정하려는 교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양 목자가 나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따라 고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성령은 오늘도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십니다.
교회는 목자장께 속한 양 떼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목자의 뒤를 따라가는 순례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소망은 어린양이 영원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 개요

신뢰의 시

시편 23편은 시편 중의 시편이요 가장 사랑 받은 시편이다. 전체 성경을 통털어서도 가장 사랑 받는 시편이다. 헨리 워드 비처는 '시편의 나이팅 게일'이라 불렀고, 찰스 스펄전은 '시편의 진주'라는 표현을 아까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시편이다. 시편은 매우 단순하고 단백하다. 꾸밈이나 현학적 장치가 거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팔레스타인인의 일상적 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누구나 공감을 일으킨다.

시편 23편에 담긴 내용은 일반적으로 아는 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역사적이고 신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로 가득차있다. 1절의 목자의 개념은 시편 23편 전체를 이끌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23편의 분석했다.

시편 23편의 구조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시편 23편 독법

시편 23편은 바벨론 포로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시편의 편집시기가 바벨론 포로 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은 항상 포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23편 역시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극한 두려움과 공포의 상황에 놓여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저자의 현재형이다. 이후의 모든 동사들이 미완료, 즉 미래형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장차 이루어질 구원과 회복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봐야 한다.


1-3절 목자이신 여호와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מִזְמֹ֥ור לְדָוִ֑ד יְהוָ֥ה רֹ֝עִ֗י לֹ֣א אֶחְסָֽר׃


1절은 히브리인들이라면, 아니 목자와 양의 관계를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단어에 모두 들어가 있다. '부족함이 없다'는 '로 헤세르'는 미완료 형이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도 있다. 23편의 한 동사만을 제외한 모든 동사는 미완료,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유일한 현재형은 5절로 '내 잔이 넘친다'는 표현이다. 마치 고난의 광야를 걸어갈 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기쁜 마음으로 광야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다윗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며 하나님께 신뢰를 고백하고 있다. 1절은 다윗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히브리인들에게 목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상징적 존재이다. 산양이나 들양이 아닌 일반 양들은 지구의 창조 이후 단 한 번도 사람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온 적이 없는 기이한 동물이다. 양에게는 야생성이 거의 없다. 목자가 양들을 돌보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목자와 양으로 자주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는 너희 목자다'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반에 이러한 목사와 양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 에스겔 34장 15절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시편 28장 9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 시편 80장 1절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목자의 역할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먹을 것, 쉴곳, 잠잘 곳 등을 모두 책임진다. 이뿐 아니라 다른 늑내나 사자들이 공격해 올 때도 목자는 그들과 대항하여 자신들을 양의 지킨다. 목자는 몇 달에 한 번씩 목장을 옮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목초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양들이 풀을 먹는 속도를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온도와 날씨의 변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옮겨 다닌다. 4절에서 이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부족함이 없다'는 서술의 이유를 2절에서 제공한다. 2절은 1절의 설명이자 구체화이다. 풀밭과 물가는 양들이 거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양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목자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한다. 다윗은 목자가 해야할, 마땅히 양들을 위해 제공해야할 것을 제시한다.


목자가 제공하는 것


'푸른 풀밭'(여성형 복수) '쉴 만한 물가'(남성형 복수)는 목자가 제공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3절과 짝을 이룬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신에게 영적 양식을 제공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임을 확신한다. 마지막 장소는 6절에 나온대로 '여호와의 집'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푸른 풀밭과 물가가 아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외형적 놀라운 평안함과 대비되어 내면에는 엄청난 긴장과 초조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형과 남성형을 사용하여 짝을 완성함으로 완전함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누이시다 인도하시다


'누이시다'는 히필형 동사는 히브리인들이 음식을 먹을 취하는 자세다. 우리나라는 앉아서 먹기 때문에 의아해 보이지만 음식을 먹는 것은 생존을 너머 평안과 직결된다. '인도하다'는 피엘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담겨있다. 히브리어에서 히필형은 '사역 능동'의 의미며, 피엘형은 '강조 능동'이다. 다윗은 두 형태를 사용하며, 일반 강조에서 강한 강조로 넘어가고 있다.


쉴만한 물가는 몇 가지 의미를 전제한다. 먼저는 '잔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요있는 물은 아니다. '흐르는 물'이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가란 뜻이다. 양이나 염소 등은 물이 거세게 흐름면 잘 마시지 못한다. 입과 코가 평평하게 붙어 있어서 물이 요동치며 코로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쉼이란 단어가 종종 성경 안에서 평안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우는 대상 28:2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성전일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주장이 합리적인 이유는 성전 또는 하나님의 보좌는 물이 흘러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에도 이러한 상징성을 활용하여 생명수가 성전과 보좌에서 흘러나옴을 강조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은유적으로  '쉴만한 물가'로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6절의 '여호와의 집'과 잘 어울린다.


  • 에스겔 47장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 요한계시록 21:5-6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3절은 23편의 1연에 해당되는 단락이다. 1절에서 시작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고백이 3절에서 일단 마무리 된다.


소생시킨다는 표현은 돌이킨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영어리의 return과 흡사하다. 180도 완전히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 또는 원래의 그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이다. 부흥하다는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나프쉬)을 처음의 상태, 원래의 자리로 돌이킬 것을 확신한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는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소생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수치가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여호수아 7장 9절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 열왕기상 8장48절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 시편 79장 9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 시편 106장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 시편 143장 11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시인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4절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절은 시인의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목자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기 위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인은 비록 자신이 성전으로 가기 위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야 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곳은 깊고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며, 사망이 가득한 골짜기다. 즉 그곳은 산등성이나 산정산이 아니라 깊은 어둠의 골짜기다.


팔레스타인의 목자들은 계절별로 양들을 이끌었는데 종종 계곡과 산을 건너야 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면 큰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양들이 죽기도한다. 아무리 예측해도 팔레스타인 날씨는 예측 불허다. 또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의외로 강도들이 매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양들을 훔치기 위해 매목하고 있다 양들을 훔쳐가곤 했다.


시인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와 함께 하기 때문이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1절에서 여호와를 '목자'로 표현하고, 이제는 직설적으로 목자되신 주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안위하시는 하나님


안위한다는 표현은 위로하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할 때(사 66:13), 침대가 나를 외로할 때(욥 21:4), 주께서 외로할 때(시 71ㅣ21, 119:82) 등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 김정우는 '힘을 줍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5-6절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상을 베푸시고


드디어 하나님은 시인에게 상(밥상)을 베푸신다. 그 상은 잔치상이 분명하다. 원수 앞에서 보란 듯이 잔치상을 베푸심으로 통쾌한 복수를 한다. 지금까지 원수들에게 쫓기고 내몰리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팔을 들어 승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라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조롱했다.

  • 시편 78장 19절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시인은 목자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원수 앞에서 잔치상 베푸심으로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베풀다'는 동사는 미완료(미래)형이다.

이 구절을 좀 더 확대한다면 종말론적 환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항상 잔치로 마무리 된다. 잔치는 기쁨과 보상, 회복을 의미한다. 천상에서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계시록이 마무리 되듯 잔치는 모든 것의 회복을 전제로 한다.

기름을 부으시고


승리의 표는 잔치상과 더불어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기름을 왕이나 제사장에 붓는 기름이 아니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을 주인이 손님의 머리에 발라주는 기름이다. 팔레스타인은 귀한 손님에게 머리에 기름을 바름으로 최고의 대우를 했다고 한다.


'기름을 붓다'는 동사는 시편 23편에 사용된 동사 중에 유일하게 완료형(perfect)으로 사용된 동사이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이 현재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현재형으로 봐도 무방하다.


기름을 성령과 하나님의 임재로 상징화 시킨다면, 비록 현재는 어둡고 암울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축제의 기분을 허락하셨다. 나는 지금 성령으로 충많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시편 기자가 고요한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때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임재와 공급을 통해, 하나님은 원수들에게 누구 편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트렘페 롱맨 3 <틴테일 구약주석> CLC]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토브와 헤세드


이제 마지막으로 나아간다. 선하심(토브)과 인자(헤세드)가 따를 것이라 확신한다. 토브라는 히브리어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보시기 좋았더라'에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행하심의 완전성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토브와 헤세드는 롬 8:28의 구절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모순처럼 보이고 부족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은 승리할 것임을 말한다.


여호와의 집


여호와의 집은 설명이 필요 없이 성전인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가고 싶은 곳은 여호와의 집이다. 여호와의 집에 간다는 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다시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꿈구는 말이다. 확장시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아버지에 집에 거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징계의 시간이고, 고난의 시간이다. 하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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